싸움의 미학

나는 너를 믿는다

by 꽃반지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애인과 함께 봄을 맞으러 간 제주도에서 식당을 고르는 문제로 다퉜다. 렌터카 안이었다. 내 가슴에 들끓는 불꽃 때문에, 자칫 팽팽해진 자동차 안의 공기에 불이라도 댕길까 싶어 문을 있는 힘껏 크게 쾅! 닫고는 저벅저벅 걸었다. 화가 더 크게 번지지 않으려면 일단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 애인이 얼른 뒤따라오기를 바랐지만, 저도 저 나름의 입장이 있는지라 꽁해서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따라오는 발걸음이 없으니 내 가슴에서 들끓던 불꽃이 발바닥까지 옮겨 붙었다. 불붙은 빠른 걸음으로 씩씩대면서, 아직은 제법 센 제주의 봄바람을 뚫으며 무작정 걸었다.


워낙에 꼼꼼한 성격의 애인은 2박 3일의 일정을 노트에 빼곡하게 짜 왔고, 딱 그 반대점에 서있는 나는 '계획표대로 따르겠습니다'하고 맡겨버렸다. 그날 우리가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 곳은 떡볶이가 유명하다는 P식당이었다. 그렇지만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듯 계획표가 조금씩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고, 이미 식사 때를 넘겨버려 우리는 몹시 허기진 상태였다. '어디라도 좋으니 그냥 가서 아무거나 먹자'가 나의 주장이었고, 그는 '이왕 온 김에 조금만 더 참고 맛있는 곳에 가서 먹자'라고 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창밖을 보니 '고기국수'라고 쓰인 간판이 크게 확대되어 눈에 들어왔다. 애인에게 한 번 더 '나 너무 배고픈데 여기서 먹자'라고 청했지만, 그는 '조금만 더 참자. 20분이면 도착한다'라고 말하며 속도를 높였다. 나는 눈물, 아니 침을 삼키며 고기국수 간판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P식당 앞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맞이한 건 '휴무입니다'라는, 북 찢은 연습장에 매직으로 써놓은 다섯 글자였다. 애인은 당황하며 나의 표정을 살폈고, 나는 마침내 폭발했다.


오늘 휴무인 줄 몰랐어?

인터넷엔 영업일이라고 나와있어서... 아, 미리 전화를 해봤어야 했는데...

그러니까 내가 그냥 아무거나 먹자고 했잖아!!!!! (여긴 느낌표를 한 다섯 개는 박아줘야 합니다.)

... 아까 가고 싶어 했던 고기 국수집에 갈까?

여기서 거기까지 가는데 또 20분을 참으라고?


이미 화가 허기를 누른 지 오래였다. 아무런 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몇 분간의 침묵, 그리고는 차에서 내려 문을 쾅 닫고 발길 닿는 대로 저벅저벅 걷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화해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결국 뭘 먹었는지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이런저런 이유로 다툼이 끊이지 않는 집에서 컸다. 늘 소란했다. 그 소란이 내 귀를 타고 들어와 심장까지 깊이 찔렀다. 그래서 혼자 살면서는 집에서 모든 소리를 제거해버렸다. TV가 없고, 오디오가 없다. 지금은 업무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평소 집에서는 인터넷도 하지 않는다. 핸드폰은 항상 무음이라 전화를 걸어온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할 때가 많다.

'여기 깊은 산속 같아.'

내 집에서 하룻밤을 자게 된 친구가, 옆에 누워 가만히 했던 말이다. 내 주변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사람들을 살펴보면 저마다 각양각색이다. 혼자서 웬만한 강당 하나는 너끈하게 울리는 요란한 악기 같은 이도 있고,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유리 같은 이도 있고, 다가서기가 괜히 거리껴지는 바싹 마른 선인장 같은 이도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남들 눈에 어떤 사람으로 비칠진 잘 모르지만, 난 내 주변의 소리를 흡수해버리려고 애쓰며 살았다.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니까. 모든 걸 흡수해버리는 스펀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람 사이에서 갈등이야 있지만 싸움으로 번진 적은 없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싸움도 마주쳐야 짝!소리라도 날 텐데, 상대방이 손바닥을 내밀어도 내 쪽에서 손을 뒤로 감췄다. 분노는 바람결에 실어 보내고, 오해는 눈물로 삼켰다. 삼켜도 삼켜도 내려가지 않는 감정들이 들끓는 밤엔 벌컥벌컥 탄산수를 마셨다.


그런 내가 애인과는 종종 다퉜다. 큰 소리가 난 적도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다 쏟아내고 일부러 아픈 말을 골라 내뱉어도, 너는 내 곁에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것 같다. 이렇게 나를 다 보여줘도 우리의 관계는 안전하다고. 운전도 못하면서 놀이공원 범퍼카 핸들은 신나게 꺾을 수 있었던 것처럼.


항상 손을 맞잡고 걷던 우리는, 어느새 각자의 손을 주머니에 넣고 걷게 되었다. 손을 잡으려다 주머니에 꽂혀있는 애인의 손을 보면, 나도 슬그머니 주머니에 손을 꽂곤 했다. 손뼉을 마주칠 일이 점점 사라져 갔다.


거리에서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그저 그들의 감정싸움에만 골몰하는 연인들을 보면, 여기서 왜 이래 싶다가도 한편으론 들곤 했던 부러운 마음의 정체가 뭔지도 이젠 알겠다. 그냥 나는 너를 무던히도 많이 믿었다 싶다. 그런 애인과 헤어졌다. 얼마 전의 일이다.


그날의 싸움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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