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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Sep 19. 2019

열 숟가락 깨물어 안 맛있는 숟가락 없다

낑낑대며 만들었던 유부주머니



우리 사이는 80광년


어느덧 연말, 사찰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수업 전에 작은 시상식(?)이 열렸다. 스님이 그해 수업에 가장 많이 참가한 사람 두 명을 호명하며, 템플스테이 이용권을 선물로 건넸다. 템플스테이 때 먹었던 그 밥맛이 어렴풋이 혀끝을 스쳤다. 부러워라... 내게는 템플스테이 이용권이 사찰음식 무료 시식권으로 보였다. 물론 서울 시내 유명한 사찰음식점도 몇 번 가봤지만, 절에서 먹는 밥을 따라갈쏘냐. 같은 오뚜기 카레라도 집에서 먹는 거랑, 인도에서 손으로 떠먹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맛일 테니까.


"스님, 수업 몇 번 들으면 템플스테이 이용권 받을 수 있는 거예요?"

"저 두 분은 80번 넘게 들으셨어요. 저도 놀랬네요." 스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80번이요? 그걸 어떻게 이겨요!"


목표로 정한 건 어떻게든 쟁취하고야 마는 목표지향적 인간이지만 -목표의 90% 이상이 맛집과 빵집 탐방. 다른 목표를 세웠다면 좀 더 훌륭하고 고매한 인간이 됐을까요- 1년에 80번을 들어야 사찰음식 시식권, 아니 템플스테이 이용권을 받을 수 있다니 맥이 빠졌다. 1년에 80번을 들으려면 적어도 한 달에 7번, 그러니까 매주 주말을 투자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때만 해도 나는 기껏해야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수업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80이란 숫자가 내게서 80광년 떨어진 별빛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승자 중 한 명이 웃으며 내게 날린 한마디는 80광년을 순식간에 800광년으로 만들었다.

"나 특강은 빼고 80번이야. 특강까지 치면 90번도 넘을 걸."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수업 많이 들을 생각하지 말고, 그냥 템플스테이를 가면 되지 않나?'라는 합리적인 의문을 가진 분들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무료배송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기어코 안 쓸걸 알면서도 장바구니에 이런저런 것들을 쓸어 담고, 필요했던 본품보단 사은품이 갖고 싶어 밤잠을 설치다 결국 눈을 떠보면 잠결에 결재한 목록이 버젓이 있고(잘했어! 렘수면!), 락앤락 통이 하나도 안 갖고 싶은데 커피를 사면 락앤락 통을 준다는 말에 갑자기 락앤락 통에 대한 소유욕이 치솟아 마시지도 못하는 커피를 사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그때는 상상 못 했다. 내가 주말은 물론 특강까지 다 챙겨가며 사찰요리에 푹 빠질 줄, '개인 사정'이라고 회사에 반차를 내고 도마 앞으로 달려갈 줄, 80광년이 그렇게 내게 성큼 가까워질 줄 그 누가 알았을까.



그냥 맛있는 게 좋아서요


"매주 오시는 분 맞죠? 자주 뵙네요."

"조리과 학생이시죠?"

"여기 직원 아니셨어요?"

매주 주말은 물론, 어떤 때는 휴가를 쓰고 평일 수업도 참가하니 어떤 분들은 나를 종종 직원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자격증 취득이 목표냐고 묻는 분도 있고, 인생에서 뭔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칭찬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내가 사찰요리를 열심히 배우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냥 맛있는 걸 먹는 게 좋고, 배우는 요리 중의 대부분은 식당에서 사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매월 초마다 강의 일정이 뜨면, 마음에 드는 수업을 골라 신청하면 된다. 처음 배우기 시작할 때는 메뉴 이름을 봐도 뭔지 모르니 신청하기 애매했다. 육근탕? 타락죽? 제피 장떡? 지금은 저 이름만 봐도 입가에 침이 뚝뚝 흐르지만 그때는 맛을 가늠할 수 있는 요리만 신청했다. 유부주머니 탕, 짬뽕밥, 고추잡채 같은 것들. 분명 먹어본 음식인데도 지금껏 알던 맛과는 급이 달랐다. 바람 넣다만 풍선처럼 속이 부실한 판매용과는 달리, 손으로 직접 만든 유부주머니는 새로 산 쿠션처럼 귀퉁이까지 속이 꽉 찼고, 짬뽕밥은 계곡 하나를 통째로 갈아 넣었나 싶을 정도로 얼큰했고(아, 먹고 싶다...), 생일날에도 영 손이 안 가던 잡채는 새삼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나 싶었다.


맛있는 걸 자꾸 먹고 싶으니 한 달에 한번 가던 것이 두 번이 되고, 곧 한주에 한 번이 되고 두 번이 되고 어떤 때는 한주에 네 번도 갔다. 너무 많이 가나 싶어 일부러 수업을 좀 줄여보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집에 누워 강의 일정표를 들여다보며 깊이 후회했다. 참회의 침이 입가를 타고 흘렀다. "아... 오늘은 얼마나 맛있을까!" 이젠 강의 일정표가 메뉴판처럼 느껴진다. 메뉴판, 아니 강의 일정표를 펼치고는 이렇게 외치는 거다.

"여기 있는 메뉴 싹 다 주세요!"



그래서 뭐가 제일 맛있냐면요


자식은 안 낳아봤지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의 의미를 이제 좀 알 것도 같다. 열 숟가락 깨물어 안 맛있는 숟가락이 없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최애 메뉴를 곰곰 생각해봤지만, 금세 포기했다. 봄이면 통통하게 물오른 두릅을 튀겨내 매콤 달콤한 양념에 버무린 두릅 강정이, 여름이면 불린 콩을 되직하게 갈아 산뜻한 오이 고명을 올린 콩국수가, 가을이면 간장과 조청에 버무린 후 깨를 솔솔 뿌린 쌉싸름한 우엉조림이, 겨울엔 뜨끈하고 얼큰하고 개운하기까지 한 탕이 나를 즐겁게 해 주니까.


더워서 밤새 이불을 발로 차며 킥을 연마하던 여름이 언제였나 싶게, 선득한 공기에 잠을 깨는 요즘이다. 샤워를 하고 나면 몸에 맺힌 물방울이 서늘하게 느껴진다. 하늘의 채도가 높아졌고, 벽에 닿는 햇살이 고소한 노란색을 띤다. 가을이 왔구나. 자, 지난여름 내내 나와 찐한 사랑을 나눴던 과일 물김치도, 비 오는 날 부쳐 먹었던 짭짜름한 장떡도, 새파랗게 볶아낸 풋고추도 이젠 안녕. 난 이제 토란국에 우엉밥을 말아먹어야 하니까. 내 숟가락은 계속 바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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