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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Nov 03. 2019

이 모든 게 처음    


내 인생 첫 템플스테이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불교 관련 사업을 하고 있었다. 대표가 불교 정신에 푹 젖어있었기 때문에 여느 회사와 달리 특이한 점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규로 '음식 버리지 않기', '일회용품 쓰지 않기' 등이 있었고, '입사 후 1년 안에 템플스테이 다녀오기’도 있었다. 규모가 작은 회사다 보니 사람의 드나듦이 잦았고, 빈자리를 남은 인력으로 충당하기 위해 업무도 수시로 바뀌었다. 변화를 기꺼이 즐기는 이가 있고, 그런 이가 소규모의 스타트업 회사에 제격이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애당초 변화를 싫어했다.


여행을 가면 여러 곳을 들리기보단 마음에 드는 한 곳을 여러 번 방문하는 스타일이고, 식당에선 새로운 메뉴를 시도하기보단 '늘 먹던 그 메뉴'를 주문했다. 오죽하면 내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오늘도 알리오 올리오시죠?"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주문에 들어가는 파스타 집도 있었다. 중국 유학을 할 때는 학교에 딸린 식당에서 무려 8개월 동안 돌솥비빔밥만 먹었다(싸고, 양 많고, 꽤 맛있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지구 종말 때까지 똑같은 메뉴만 먹을 수 있다 해도 맛만 있다면 얼마든지 즐길 준비가 되어있는 내게,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사람과 업무는 벅찼다. 몸보다는 마음이 힘들었고, 입사 1년쯤 되자 밤낮으로 퇴사를 고민하느라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문득 그동안 바빠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규를 생각해냈다. 그래, 다녀오자.

(※제가 다녀온 템플스테이는 교육에 중점을 맞춘 프로그램으로 수련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일반적인 사찰에서 진행하는 템플스테이가 아니니,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4박 5일의 과정을 마치고 주말 이틀 동안 푹 쉬면, 무려 일주일이나 회사를 땡땡이 칠 수 있었다. 수련원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회사 동료들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해방감에 들뜬 것도 잠시,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모든 소지품을 반납해야 했다(핸드폰은 물론, 볼펜 한 자루도 지참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하얀 벽엔 유리에 끼워진 현판 외에 어떤 것도 걸려있지 않아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아... 아무것도 없어... 그저 새하얀 공간뿐이야!" 마침내 <드래곤볼>에 등장하는 정신과 시간의 방에 당도한 것인가! 바깥에서는 고작 이틀인데, 안에서는 2년의 세월이 지나있다는...


시간도 모르겠고, 핸드폰도 없고, 면회 오는 사람도 없는 데다, 곤히 자다 새벽마다 귀를 번쩍 때리는 스님의 점호에 벌떡 일어나 양반자세로 앉았다. 군대는 안 가봤지만, 군대온 심정이 이런 걸까. 다리에 쥐가 날 때까지 몇 시간이고 앉아서 스님과 문답을 했다. '템플스테이'하면 TV에서 봤던 푸르름 가득한 30초짜리 영상만 기억했던 나는, 푸른 숲 속에서(그때가 겨울이라 모든 풍경이 스산하긴 했다) 스님이 따라주는 차를 마시며 하하호호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풍경만 상상하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한 대도 아니고 연타로, 딱딱 딱딱-딱! 사흘째는 피로가 극에 달해 코피가 쏟아졌다. 피를 보고 나니 이건 아니다 싶어 중도 하차하기로 마음먹었다. 중도 포기자는 서류에 사인을 해야 했는데(이미 두 명의 포기자가 있었다), 회사에 뭐라고 얘기할지도 모르겠고 면이 안 서는 것 같아 몰래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도착한 첫날 아무 생각 없이 구겨 버렸던 버스 시간표를 찾으려고 휴지통을 뒤지기까지 했다. 찾지 못해 결국 탈출은 실패했지만.



내 인생 첫 사찰요리

무엇보다 나를 괴롭게 한 것은 배고픔이었다. 평소에도 허기를 못 참는 편이라 수시로 뭔가를 계속 입에 넣어야 했는데, (옆자리 동료나 친구들이 나에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또 먹어?”다.) 거기에선 하루에 딱 두 번 밥을 줬다. 하루는 스님이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사과 하나를 손에 들고 이야기를 는데,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사과만 보였다. 저 사과를 낚아채 눈 쌓인 겨울 숲으로 도망가는 상상만 반복했다. 눈밭에 주저앉아 엉덩이가 젖는 줄도 모르고 저 빨간 사과를 와삭, 깨물고 싶었다. 그냥 생쌀만 줬대도 허겁지겁 씹어먹을 수 있을 정도로 배가 고팠는데, 하루 딱 두 번 나오는 밥엔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밥이 너무 '아름다웠다'. 밥을 본 사람들이 모두 탄성을 질렀다. 사진이나 메모의 형태로 남길 수 없어 얼마나 아쉬웠는지. 고깃집에서 흔히 보던 쌈채소는 흡사 부케 같았고, 샐러드에는 처음 보는 작은 꽃이 흩뿌려져 있었다. 식사에 앞서 그날 식사를 준비한 분이 "이것은 무엇으로 만들었고, 저것은 무엇으로 만들었고..."조곤조곤 설명 해주셨는데,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게 좋았다. 메뉴 소개가 흡사 시 낭송 같다고 이야기한 이도 있었다. 어쩌자고 매 끼니가 이렇게 황홀한 건지. 버스 시간표 핑계를 댔지만, 실은 다음 끼니가 궁금해 번번이 주저앉았고 어쩌면 밥 덕분에 450일 같던 4박 5일간의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다시 일상의 박자에 올라탄 나는 금세 모든 걸 잊었지만, 왠지 그때 먹은 밥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졌다. 또 먹고 싶었다. 이젠 4박 5일쯤이야 너끈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4박 5일을 바꿔 말하면 '식사 열 끼 제공'아닌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교육과정은 일생에 딱 한 번만 참가할 수 있었다. 이젠 다시 그 밥을 못 먹는단 뜻이었다. 내가 누군가. 세상 그 무엇보다 먹는 일에 제일 열정적인 사람 아닌가. '빵지 순례'라는 말이 있기도 전에 홍대와 합정, 상수의 빵집 80여 곳을 두루 돌며 손수 빵 지도를 만들었고, 버스정류장에서 누군가 들고 먹는 빵만 봐도 어느 집 빵인지 맞출 수 있었다. 팥빙수 한 그릇 먹겠다고 8월 땡볕에 두 시간을 줄 서는 것도, 강남에서 한 시간 줄 서서 평양냉면 먹고 다시 한 시간을 버스 타고 종로에 가서 후식으로 젤라토를 먹는 것도 내겐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다면 그 정도 수고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그 밥을 다시는 먹을 수 없다니! 내가 만드는 수밖에. 처음에는 기억을 더듬어 흉내를 냈다. 쌈채소를 접시에 어떻게 꽂았더라, 이런 모양이었던가? 이게 아닌데... 답답한 마음에 사찰요리 전문점에도 몇 번 갔지만, 그때 그 느낌이 아니었다. 실은 그 밥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수련원에서 밥 짓는 분도, 메뉴도 정해진 게 아니었다. 그날의 상황과 재료에 맞게 만들어진 즉흥 창작물이니, 같은 사람이 같은 재료로 요리한다 해도 똑같은 요리를 만들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가 찾는 건 그때 그 밥이 아니라 밥을 받아 들었을 때, 백열등 백개를 동시에 켠 컷처럼 주위가 순식간에 환해지던 그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 느낌을 찾아야 했다. 내가 먹고 싶은 웬만한 음식은 아쉬움 없이 뚝딱 만들던 편이라 살면서 돈을 내고 요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사찰요리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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