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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Oct 07. 2019

채수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리니

다시 먹을 수 있다면 여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사찰요리'라는 단어를 들으면 당신의 머릿속엔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풀? 스님? 절? 내 주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찰요리를 배운다고 말하면, 쓴맛이 나는 물음표를 삼킨 것처럼 사람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사찰요리? 그거 뭐 풀때기만 먹고 그러는 거 아니야?"

"세상에 맛있는 게 많고 많은데 왜 하필 사찰요리니?"

"차라리 한식이나 중식, 양식을 배워보지 그래?"


많은 사람들이 사찰요리를 풀때기, 맛없는 음식, 단출한(=초라한) 음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분, 크게 속고 계신 겁니다. 스님들이 얼마나 맛있는 요리를, 계절별로, 다양하게 접하는지 알면 깜짝 놀라게 된다. 게다가 사찰요리로 냉면도, 짬뽕도, 떡볶이도, 메밀국수도, 파스타도 모두 가능하다. 심지어 파는 것보다 훨씬 맛있게(스님들이 가끔 절에서 피자나 파스타를 해 먹었다는 말을 들으면, 그 순간만큼은 나도 머리 깎고 싶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채수'덕분이다.



네가 잘하는 건 아는데...

한국인의 몸에는 크게 두 가지 액체가 흐른다고 생각한다. 라면 국물과 멸치육수(그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국요리는 일단 멸치육수부터 우리고 본다. 멸치육수를 우리면서 뭘 할지 생각해도 늦지 않다. 팔팔 끓는 멸치육수로 만둣국을 끓여도 되고, 김치찌개를 끓여도 좋다. 소면을 재빨리 삶아낸 뒤, 멸치 육수를 부어 먹어도 별미다. 라면을 먹지 않은지 7년이 넘었지만, 1인당 연간 라면 소비량 세계 1위국의 국민답게 한창 라면을 먹을 땐 깊은 맛을 위해 멸치육수를 꼭 우렸다. 검색창에 '멸치육수' 네 글자를 집어넣기만 해도 게시물이 약 61만 개가 뜨니, 한국인의 멸치육수 사랑은 이토록 깊고도 지극한 것이다.


채수는 육수의 반대되는 개념이다. 사찰요리에서 멸치육수를 사용할 수 없으니, 채소를 우린 물을 사용한다. 달큼한 맛을 내는 무와 깊은 감칠맛을 내는 표고버섯과 다시마를 기본으로, 각종 채소를 넣고 끓이면 된다. 채수를 내기 위해 일부러 채소를 구입할 건 없고, 요리하고 쓰고 남은 채소 꼬투리를 활용하면 된다. 어떤 채소든 환영이다. 당근도, 양배추도, 호박도 모두 모두 대환영! 이렇게 끓여낸 채수는 사찰요리에 두루 쓰이며, 한국요리의 멸치육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많은 사찰요리에 기본적으로 채수가 들어가긴 하지만, 채수 자체로 승부를 보는 요리는 별로 없다. 탕이라면 채수에 갖은 야채를 집어넣어 야채의 향과 맛으로 먹는다. 시원하게 먹는 냉국은 채수에 매실청과 고춧가루, 간장을 넣는다. 한 숟갈 뜨면 새콤달콤한 맛이 입을 확 사로잡기 때문에 역시 채수 본연의 맛을 느끼기엔 무리. 볶음이나 찜도 마찬가지다. 채수가 들어가지만, 채수가 없다면 생수로 대신해도 무방하다(물론 맛의 차이는 있겠지만). 채수가 몸에 좋다는 것도 알고, 특유의 감칠맛도 인정하지만 채수를 맹신하진 않았다.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거라고 얕잡아봤다. 무와 표고버섯, 다시마가 끓는 물 안에서 아무리 춤을 추어도 어떻게 태평양 푸른 바다를 한껏 품은 멸치를 따라가겠나 싶었다. 줄곧 채수의 지분을 크게 인정하지 않다가, 계급장(?) 다 떼고 채수와 제대로 맞붙는 날이 왔다.



너, 이 정도였니?

메밀소바는 장국 맛으로 먹는다. 국이 아닌 걸 알고 나서도, 곧 있으면 채반에 곱게 올려진 국수가 나올걸 알면서도, 기다리면서 장국을 후루룩 마시곤 했다. 국수가 나올 때는 장국이 이미 바닥나 다시 리필하는 경우가 대부분. 장국만 먹고 싶어 레시피를 검색해보면 들어가는 게 꽤 많은 데다 가쓰오부시가 빠지지 않았다. 가쓰오부시가 장국 맛을 좌우한다고 해도 무방했다. 식당에서 내놓는 장국도 시판 소스를 쓰거나 가쓰오부시 맛을 어설프게 흉내 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정말 맛있는 장국을 만나면 두고두고 생각이 났다. 이미 갈린 것을 쓰기보다는 처음부터 제대로 갈아서 쓰고 싶어서, 일본 놀러 간 친구에게 가쓰오부시용 대패를 부탁한 적도 있다.


사찰요리를 배우면서 눈이 휘둥그레 해진 적은 많지만, 냉메밀을 배우게 되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멸치도 모자라서, 채수로 가쓰오부시 풍미를 구현한다고?설마. 채수로 어설픈 흉내내기야 가능하겠지만, 승패가 빤한 게임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채수를 진하게 끓여내 간장, 설탕으로 간하는 게 장국 레시피의 전부. 스님 딴에도 채수가 최선이니까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사찰요리에서 가쓰오부시 맛이 난다고 하면 사찰요리의 정신에 위배되겠지만, 어쨌든 간혹 만났던 정말 맛있는 그 장국이 식도를 고요히 적셨다. 어, 이게 뭐지? 싶어 한 숟가락 떠먹고 다시 떠먹었다. 나중엔 그릇째 들고 마셨다. 뭐가 들어갔는지 내가 히 다 봤는데, 내 손으로 냄비에 집어넣었는데 이게 어떻게 가능한 맛일까. 완벽한 채수의 승리였다. 그동안 채수의 부족한 면을 다른 채소나 양념이 보완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다. 채수가 그들의 맛을 한층 끌어올리고 있었다.



걔가 다 해요, 잘해요  

처음 사찰요리를 배우러 오는 분들이 채수 맛을 보고는 "이게 뭐예요?"하고 꼭 묻는다. 말 그대로 채소 국물이기 때문에, 처음 맛을 보면 심심하고 담백한 맛이 낯설어 자꾸 입맛을 다시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채수로 요리를 한 뒤, 맛을 보고는 다시 묻는다. "와, 이게 뭐예요? 어떻게 이런 맛이 나요?" 그들의 놀란 눈동자를 보며 난 빙그레 웃을 뿐이다.


채수는 어떤 야채를 좀 더 넣느냐에 따라 끌어낼 수 있는 맛이 무궁무진하다. 달큼한 맛을 원하면 양배추를, 시원한 감칠맛을 원하면 감자를 넣는다. 여기에 간장을 조금 넣어주면 따끈한, 혹은 시원한 국물 국수를 즐길 수 있고, 좀 더 진하게 만들면 장국도 뚝딱이다. 몸이 으슬으슬한 날, 따끈하고 개운한 탕이 당기면 채수에 마른 홍고추 몇 개를 부셔 같이 끓이면 된다. 보약이 따로 없다 싶을 정도로 기분 좋은 향과 뜨끈한 기운이 올라와 금방 온몸을 데운다.  


채식을 하게 되면서 멸치도, 가쓰오부시와도 이별했지만 돌아서는 내 모습이 그리 눈물바람이진 않았다. 멸치도, 가쓰오부시도 모두 품어주는 채수가 내 곁에 있으니까. 채수가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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