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속의 어둠을 견디는 법

<괴물의 아이>

by 꽃반지


주방 싱크대에다 먹을 걸 넣어두고 그걸 까맣게 잊고 있다가 1년 후에야 갑자기 생각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얼마나 썩어 있을까요. 문을 열면 바퀴벌레와 온갖 벌레들이 음식물을 뜯어먹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음식물이 이상한 생명체로 변한 것은 아닐까요. 저는 문을 열기가 두려웠습니다. 싱크대 문을 열 수 없는 것처럼 저도 제 안을 들여다보기가 겁이 났습니다. (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중)



누구나 마음속에 어둠을 키운다. 뜨거운 살의와 기괴함, 두려움과 허영, 이름 붙이기도 애매한 온갖 것들이 뒤범벅되어 날마다 나를 갉아먹는 무시무시한 괴물을. <괴물의 아이>가 보여주는 세상에는 두 가지 세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알고 매일 발디디며 살아가는 인간 세계, 그리고 또 하나는 인간 세계와 이어져 있지만 보통 인간은 결코 찾기 어려운 짐승들이 사는 세계이다. 이 짐승들은 마음 속에 어둠이 없는 순수한 존재들로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짐승들의 세계에 인간이 발디딜수 없는 이유는 인간이 품은 내면의 어둠 때문인데, 어둠은 모든 것을 좀먹고 파괴하기 때문에 신들의 세계에서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주인공 렌(큐타)은 우연히 신들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그리고 신들의 세계에서 가장 제멋대로이고 고집불통인 '괴물'을 스승으로 삼게 된다. 스승과 제자는 연신 티격태격하지만 서로의 좋은 짝이 되어준다. 부모와 스승없이 척박하게 혼자 자라 제멋대로 강해질 수 밖에 없었던 괴물 스승과, 역시 가족의 붕괴로 상처입은 소년의 시간이 보듬어진다. 그러나 소년은 인간이다. 가슴에 어둠을 품은 인간. 어린 시절,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며 얼핏 엿보게 된 어둠은 소년을 따라다니며 함께, 고요히 성장한다.


시간이 흘러 신들의 세계에 완벽 적응한 듯 보이지만, 소년은 잊고살던 인간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크다. 스승 몰래 신들의 세계를 빠져나가 학교에서 수업도 듣고 책도 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온다. 그런 소년의 곁에 어느새 한 소녀가 늘 함께다.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은 <모비딕>이라는 책이다. 9년만에 처음 나와본 인간 세계에서, 소년이 소녀를 처음 만난 도서관에서, 소년은 서가에 꽂힌 <모비딕>을 빼들고 마침 곁에 서있던 소녀에게 묻는다.

'이게 무슨 한자니?' '고래 경.'


고래. 고래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죽음의 각오로 맞서야 하는 존재다. <모비딕>에서 고래와 맞선 인간은 결국 죽음의 최후를 맞는다. 고래가 등장하는 또다른 소설 <노인과 바다>는 생의 모든 것을 건 사투끝에 마침내 고래를 상대로 장렬한 승리를 거머쥔 작고 노쇠한, 그러나 위대한 인간을 그린다. 무심한 바다에서 고래가 튀어 듯, 무심해 보이는 삶의 어느 토막에서 어둠이 불쑥 솟아오를 때,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있는 힘을 다해 모든 것을 걸 수 밖에 없다. 살아있는 한, 살아있을 때까지 우리의 모든 것을 걸 수 밖에 없다. 삶 속으로 추락하든 삶을 디디고 올라서든 그것은 끝까지 해본 자만이 알 수 있다. 소년이 도서관에서 <모비딕>을 빼드는 순간은 곧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존재인 고래가 소년의 삶에 등장할 것이라는 걸 암시한다.


소년이 어린 시절부터 가슴에 품었던 어둠은 모른척 한다고 사라질리 없다. 힘이 세진 어둠이 문득 문득 튀어나와 소년을 쥐고 흔들때마다 소년은 두려워 떨었다. 마음이 온통 어둠에 뒤덮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소년은 용기를 내 자기 안의 깊숙한 어둠을 들여다보기로 선택한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에서 피존씨가 얘기했던 것처럼, 내 안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면 무엇이 있을지 두려워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어둠이 소년을 거세게 뒤흔들 때, 소년의 모든 것을 삼키려 할 때, 소년이 올곧게 어둠을 마주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자기를 키워준 스승, 그리고 줄곧 자기를 믿고 응원해 준 소녀의 존재다. 소년이 자기 안의 어둠을 디디고 올라서 눈앞의 거대한 고래를 마주한 순간, 괴물 스승은 제자를 위해 목숨을 바쳐 고래를 무찌를 검이 된다.


그러니까 누구나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어둠을 정면돌파 하는 것은, 분명히 혼자서 해내야 하는 일이지만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가슴 속의 어둠을 품고 자라게 한 오랜 시간이 있는 것처럼, 그 어둠을 무찌를 수 있는 단단하고 뜨거운 가슴 속의 검도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어둠은 내 안에서 혼자 자라지만, 그 검은 결코 혼자 자라지 않는다. 나를 보살피고 키워주는 든든한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나는 그 마음을 사랑이라 이름 붙인다.


영화의 엔딩에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내 안의 세계에서만 들리는 총성' 이라는 가사가 있다. 그래, 어둠은 아무도 모른다. 내 안의 세계에서만 들리는 총성이다. 그 총성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또 언제 른지 아무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그 총성을 들으며 저 세상으로 떠났다. 남들에게 그 전쟁을 멈춰달라 할 수 없다. 그 전쟁은 나만이 끝낼 수 있다. 그러나 끝낼 수 있는 힘은,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서 온다.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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