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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an 01. 2020

나는 참 외롭습니다

2020년 불꽃놀이


내년부터 다니게 될 회사에서 송년 모임에 나를 초대했다. 한 해 동안 어깨를 겯고 한 목적지를 향해 달려온 이들이 서로의 노고를 축하하며 위로하는 자리에, 말 그대로 숟가락만 달싹 얹게 됐다. 초대에 응한 것은 나였지만 당연히 어색했다. 집이 어디냐, 가족은 어떻게 되냐, 취미가 뭐냐... 낯선 이를 향한 낯선 이들의 두루뭉술한 질문과 두루뭉술한 대답들이 식사 자리를 오갔다. 혼자 살고 있다는 대답에 누군가가 "난 혼자 사는 거 외로워서 못 견디겠던데."하고 말했고, 나는 "저도 못 견딜 만큼 외로워요."하고 그 말을 이었다. 이번엔 마음속으로.



난 외로워서 못 견디겠던데

나는 철저한 내향형 인간이다. 말 그대로 '낯선'사람을 만나도 그다지 낯을 가리지 않고 할 말을 잘하며, 어떤 모임이든 적당한 존재감을 지켜내면서 물처럼 잘 스며드는 편이기 때문에, 나를 오래 봐온 사람이든 짧게 본 사람이든 '내향형'과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를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실은, 나는 많은 사람과 뒤섞이는 시간과 공간을 머쓱해하고 불편해하고 못 견디는 수줍은 사람일 뿐이다. 어릴 때는 나의 이 내향형이 집과 학교에서 그대로 발현되었음에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초등학교 4학년이 될 때까지 같은 반 아이들과 말을 안 했고, 오히려 전학생이 말을 먼저 걸고 다가와 친구가 되어줬다. 단지 내게 떡볶이를 얻어먹기 위해서였지만-시간이 흐르면서 사회화를 거쳐 오늘의 내가 반강제적으로 완성되었다. 무난한 어른이 되려면 많은 사람과 함께 뒤섞이는 시간과 공간을 적당히 즐기고 감내할 줄 알아야 했으니까.


나에 대해 잘 모를 때는 내가 나 이외의 타인을 모두 거부하는 줄 알았다. 외롭지만 혼자 있는 편이 덜 힘들다고 느꼈고, 그래서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걸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혼자 영화를 봤고, 국내든 국외든 인생 대부분의 여행을 당연한 듯이 혼자 다녔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니, 나는 사람 자체를 굉장히 좋아다. 다만 '많은'사람을 힘들어할 뿐이었다. 기타 단체 강습을 금방 그만둔 이유도, 주말마다 우아하게 차려입고 우아한 것들을 먹고 마시는 홍차 모임을 나가지 않게 된 것도, 1년째 나갈 결심 반복하고 있는 배드민턴 동호회도 나의 이런 성향 때문인 걸 알았다. 몇몇 사람들과 깊게 맺는 관계를 좋아했다. 친구를 집에 초대해 같이 차를 마시거나 밥을 해 먹고, 서너 명의 사람들과 자주 들르는 카페에 앉아 작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몇천 명이 꽉 차는 대규모 스타디움에서 보는 인기가수의 콘서트보다는, 의자 놓을 자리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몇 년 동안 봐온 가수의 노래를 청해 듣는 순간을 더 좋아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서로의 눈빛이 닿을 수 있는 관계를 선호하는 편인데, 이런 성향의 사람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들 중 한 가지는 어쩌면 연애다. <멜로가 체질>이라는 드라마 제목을 굳이 빌려오지 않더라도, 사람 자체를 좋아하고 서로의 눈빛이 맞닿는 거리를 선호하며, 함께 쌓아가는 순간을 기억하고 기대할 줄 아는 나는 타고난 연애 체질인 것이다. 예이!



백만 분의 일을 찾습니다

운동선수로 완벽한 신체조건을 타고났지만, 그가 애당초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 빛나는 신체조건이 동네 슈퍼 갈 때나 쓰이듯, 멜로가 체질인 나는 연애를 쉽게 하지 못한다. 많은 생각 말고 "한번 만나볼까?"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라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종종 듣는다. 시도해본 적도 있지만, 한번 만나볼까라는 생각으로 만나면 정말 딱 한 번만 만나게 됐다. 인생의 어느 때에 마침내 못 보게 되는 순간이 온대도, 지금 당장은 계속 보고 싶은 사람과 앞으로 계속 보게 될 거라는, 그리고 이 마음이 계속 갈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관계를 지속하는 게 연애인데 계속 보고 싶은 사람이 잘 없었다(그나마 아예 없지 않은 게 다행이다). 특정한 사람을 계속 보고 싶은 이유는 뭘까? 외모가 내 스타일이라서? 대화가 잘 통해서? 취향이 잘 맞아서? 그저 외롭지 않으려고?


싫어하는 이유를 찾긴 쉽지만, 좋아하는 이유를 찾긴 어렵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좋은 건 그냥 좋은 거다. 바꿔 말하면 싫어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만, '그냥'이라는 맹숭한 얼굴은 일부러 찾아다닐 수도 피할 수도 없단 뜻이다. 한때 흑인 남성과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어두운 사랑에 빠졌던 친구는 "햇살에 빛나는 검은 피부가 얼마나 섹시한 줄 아니?"라며 그를 찬양했고-이 친구는 한때 백인과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사랑도 했는데, 햇살이 투과돼 불그스름하게 빛나는 귓바퀴에 반했다나. 아무튼 이놈의 햇살이 문제다- 소개팅하러 나갔다가 얼결에 결혼까지 한 또 다른 친구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처음 만난 날, 그가 신은 양말이 귀여웠다고 했다-종종 양말 얘기를 꺼내면 그때 미쳤었다며 화를 낸다-. 언뜻 보면 피부색이나 양말색 때문에 누군가가 좋아지는 것 같지만, 그까짓 것들이 그리 대수겠는가. 햇살 대신 빗방울이 검은 피부를 적신들 친구가 반하지 않고 배겼겠으며, 소개팅 남이 주황색 양말 대신 스타킹을 신고 왔던들(이건 아닌가) 싫었겠는가. 그냥 좋은 건데. 좋아하는 미드의 한 장면이 있다. 십 대 소년소녀들이 마구 나와서 인생의 이런저런 허들을 뛰어넘으며 감동과 사랑과 우정을 만들어가는데, 어느 날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말한다. "넌 나한테 백만 명 중의 하나니까." 되게 유치하고 되게 빤하고 되게 그저 그런 대사인데, 난 이 장면이 되게 좋았다. 백만 명 중에 무턱대고 그냥 좋은 단 한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너라고 말해주는 일.


며칠 전, 갑자기 전 직장 동료가 연락이 왔다.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를 주고받다가 그녀가 "근데 연애는 하나요?"라고 본론으로 훅 들어오더니 "심장이 뛰어야 연애를 할 텐데... 손도 잡고 싶고, 뽀뽀도 하고 싶다는 맘을 갖고 싶어요."라고 하소연했다. 그런 사람을 만날 확률은 백만 분의 일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찾아낸 백만 분의 일을 사랑하는 데는 백만 배의 노력이 필요할 거라는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예전부터 친구들에게 종종 농담으로 "난 결혼식장에서 남편 뺨을 때려줄 거야. 날 기다리게 한 벌로."라는 말을 하고 다녔는데, 내 인생 계획대로라면-물론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올해가 결혼하기로 결정한 해이다. 남편 될 사람은 그 말을 언제 들었는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전 평생 남을 때려본 일도 없고 앞으로도 절대 그럴 리 없는, 멜로가 체질인 사람이니 몹시 안심하시고 적당한 때에 적당한 장소에서 적당한 미소로 마주치길 바랍니다. 백만 분의 일씨.(들리는 거죠?)"



※의식의 흐름을 따라갔더니 그 끝엔 '새해부터 연애타령'이 있었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또 받으세요. 고맙습니다, 구독자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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