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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Aug 08. 2020

노벨상 받기 전엔 안돼요   


아침도 아닌 새벽, 브런치에 막 글을 쓰기 시작한 친구에게서 카톡이 하나 왔다.

"브런치에 글 못 올리겠어. 아침부터 된장녀 취급 받음"

친구가 브런치에 올린 긴 글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랬다. '유학 다녀와서 해외 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차에 해외 발령이 잦은 대기업 다니는 남자를 만나게 되어서 결혼했다'. 여기에 좀 더 살을 붙이자면 '그 남자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친구가 쓴 글에도 적혀 있었지만, 마침 그녀가 남편과 소개팅을 하던 그 시기에 한 마케팅 모임에서 그녀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본인에게 직접 들어 연애썰은 대충 알고 있었다. 본인은 상대방(지금의 남편)이 마음에 들었는데, 상대방은 며칠이 지나도록 연락이 오지 않아 친구가 먼저 연락을 하고 연애의 성사를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친구의 글 아래에 달린 댓글은 대충 다음과 같다.

-해외파견 많은 대기업 남자랑 결혼해서 좋냐. 사랑보다 스펙이냐.

-개이득. 결혼 성공했네

-극혐


친구는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독자들이 이렇게 반응하면 어떻게 써야 되는 거냐며 울분을 토로했다. 김하나 작가의 <말하기를 말하기>를 보면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잘못 전달된 경우에는 말하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나는 글쓰기도 정적인 말하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단 친구에게 그 글을 내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나와는 생각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고 반응을 할 텐데, 의도가 와전되어 글쓴이가 감당하기 힘들다면 글을 내리는 게 맞다는 판단에서다. 그리고 고요히 고민했다. 친구가 글에서 전하고자 했던 의도는 뭐였을까?'잘난 남편 만나려고 노력해서 성공했어요'가 아니었을 텐데 의도는 왜 빗나갔을까. 해외 파견이 잦았던 상대방이 값비싼 명품백을 사줬다는 얘기를 적어서였을까? 친구가 원하는 결혼 생활에 대한 조건이 너무 뚜렷해서였을까?


전에 잠깐 같이 일했던 남자 동료는 아예 원하는 배우자 상을 체크리스트로 정리해 거기에 부합하는 사람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 적이 있다. 그 리스트가 인서울 사년제, 키 165 이상, 연봉 얼마 이상...으로 시작하는 꽤나 디테일하고 속세적(?)인 내용을 담다 보니(리스트 항목이 스무 가지가 넘는다), 어찌 보면 치사하게까지 느껴져 이맛살을 찌푸리며 "사람이 물건이에요?"하고 응수했는데, "내가 필요로 하는 걸 확실하게 원하는 게 어때서요? 전 실패하기 싫어요."라는 대답을 듣곤 아무 말도 못 했었다. 내가 연애에 줄곧 실패했던 이유는 리스트가 없어서인가! 하고. 각자 인생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른 만큼, 해외살이에 누구보다 큰 로망이 있던 차에 마침 사람도 좋고, 조건도 괜찮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 최선을 다해 잡고 싶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 속내를 겉으로 꺼낸 건 친구의 순진한 발화였나, 그렇다고 눈치 보며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만 할 순 없지 않을까, 그렇든저렇든 간에 내가 괜히 글을 내리라고 한 걸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같은 날 저녁에 친구가 책을 이만큼 빌렸다며 글쓰기 책 사진을 보내왔다.

"마음이 울적해서 책을 이만큼 빌려왔어"

나도 이름 꽤나 들어본, 글 잘 쓰는 법을 검색하면 항상 상단에 노출되어 있는 글쓰기에 관한 베스트셀러 책이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걸 정말 확실하게 아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지금도 여전히) 하면서도 나는 한 번도 글쓰기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원하는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고 행동했기에 오늘의 결과가 있는 게 아니겠나. 그리고 친구의 글에 달린 댓글을 보며 고민하던 내 마음도 오늘 읽은 문장으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영화의 장점은 악평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점에 있다. 문학은 그렇지 않다. 미술도 그렇지 않다. (중략) 영화에 대해 악평을 할 때도 지키는 나만의 기준이 있다. 흥행에 완전히 실패한 영화, 모든 사람이 비난한 영화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돈을 벌었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영화라면 욕을 해도 무방하다. 소설도 부커 상이나 노벨상을 받은 이후부터는 조금의 욕이 허락된다. 그러나 그전에는 안된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정지돈 <영화와 시> 中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쿠션이 있으면 욕 좀 먹어도 충격이 적다(물론 많이는 안된다). 영화는 되고 문학, 미술은 왜 안되는지 정지돈 작가의 논리는 잘 모르겠지만, 분야를 막론하고 뭔가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뭔가를 시작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두렵고 떨리니까 말이다. 애 둘 키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친구의 모습을 알면, 그 와중에도 뭔가를 써보겠다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노력하는 그 모습을 알면 가혹한 댓글은 달지 못할 텐데. 부디 쫄지말고 계속 쓰렴. 모르는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욕이고 아는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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