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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Sep 15. 2020

그런 삶도 살아보는 거야


실은 회사 생활에 별 미련이 없다.


출근길. 한 시간 동안 전철에 앉아 핸드폰으로  한 문장을 적었다. 아, 회사는 정말로 너무나 멀구나. 책도 읽히지 않고, 별 달리 쓰고 싶은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어젯밤에 7.5킬로 미터 가량을 뛰었더니 밤새 두드려 맞은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린다. 전철에 자리가 나면 잠에 빠져야겠다는 생각뿐이었지만, 막상 자리를 잡고 앉으니 잠은 쏟아지지 아서 멀금멀금 앉아있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 별다른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집에서 너무 멀어 출퇴근에 긴 시간이 걸린다는 점만 제외하면 다닐만한 회사다. 업무도 꽤 잘 맞고, 권위적인 상사도 없고,  마감 때를 제외하면 야근도 없는 편이다.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해서, 업무적으로 만난 사람들과는 여간해선 관를 맺고 싶어 하지 않는 내가 회사 사람 몇몇과 SNS에서 관계를 맺고 있을 정도로 나름의 친근함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도 그만두고 싶다. 전철역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오르내리면서, 막 들어오는 전철을 잡아타기 위해 계단을 다다다 뛰어내려 가면서, 엘리베이터 문에 반사된 내 모습을 보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가만히 떠오르는 한 문장을 읊조려본다. 그만두고 싶다.


회사형 인간

첫 단추가 잘 못된 건가?라는 생각을 종종 할 때가 있다. 나를 향해 두 팔 벌리던 은행에 취직을 했으면,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면, 회사 생활을 통해 높은 급여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이에 딸려오는 여러 가지 혜택을 공기처럼 당연하게 누리고 있다면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이렇게 숨 쉬듯, 잦게 하진 않을 텐데. 회사를 다니면서 늘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다. 어느 회사든 출근 첫날부터 마지막을 생각했고, 새로운 회사에 이력서를 밀어 넣을 때마다 지원 동기를 써내는 게 제일 힘들었다. "돈 벌려고요" 다섯 글자를 500글자로 늘리는 일은 얼마나 숨 가쁜 일인가. 좀 다른 맥락의 이야기지만 출판사에 다니던 어느 날, 대표님이 무슨 일인가로 화가 나서 직원들을 앉혀놓고는 "회사를 내 집이라고 생각해라!"하고 야단하셨다. 그때 속으로 한 생각은 "그러면 앉아서 일을 못하는데..."였다. 집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은 나른하게 누워있는데 회사를 집처럼 생각하면 대체 어떻게 일을 한단 말인가.


작년 여름이었나, 한창 기타를 배우던 무렵에 회사일로 꽤나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무리한 투자에 따른 경영악화로 인해 하루에도 사람들이 몇 명씩 사라졌다. 그만두거나 해고되거나 했다. 작은 규모의 회사를 적잖게 다녀봐서 경영악화나 부도가 익숙친 않았지만 그래도 낯선 풍경은 아니었는데,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몸담고 있던 회사가 어떻게 되고 당장 손에 쥘 돈 몇 푼 때문에 그런 것보다는 삶 전체가 기반 없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회사가 그렇게 싫다고 부르짖어왔으면서 알고 보니 회사와 운명공동체였다니.


나지막이 줄을 튕기며 기타 선생님에게 "선생님은 회사 다닐 생각 해본 적 없으세요?"하고 물었더니 "단 한 번도요"라는 대답을 들은 걸로 기억하고 있다. 망설임 없이 돌아오는 목소리가 기타 울림처럼 묵직하고 단단했다. 그런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는데, 회사를 안 다녀도 썩 괜찮은 기반을 닦아두어야 했는데, 싫다고 싫다고 싫다고 하면서 버티기만 했구나. 회사라는 시스템에 기대지 않으려면 내 삶의 시스템을 다 내가 설계해야 하는데 - 일의 종류, 일의 형태, 수입의 범위, 수입의 운용 등- 그런 모든 것이 귀찮고 무서웠던 것 같다. 식상한 비유지만 새장 속에 머물고 있으면 제 때 밥이 나오고, 휴가도 나오고, 무엇보다 안심이 된다. 작년 초 책을 쓰겠다고 당시 다니던 회사의 대표님에게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하던 그 순간에도 후회를 하고 있었다. 그만두고 나서는 (물론) 더 후회했다. 내가 회사형 인간이라는 걸 그만두고 나서야 알았다. 새장 안에 있어야 비로소 새장이 좁다고 불평할 수 있다. 회사형 인간이니까 회사가 싫다는 불평도 끊임없이 늘어놓을 수 있는 거였다. 방안에 노트북 켜놓고 멍하니 앉아 흘려보내는 시간을, 회사에 앉아있으면 돈으로 다 환산할 수 있었다. 내가 도대체 뭘 하는지 몰라서 노트북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앉아있기만 했다. 키보드에 올린 손가락 사이로 돈이 새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내 것,  네 것

이건 '저작권'의 문제인가,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일의 저작권. 회사 업무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바뀌어도 돌아가게끔 설계돼있다. 누가와도 그 일을 할 수 있다. 고유의 개인이 사라진다. 내가 애써 한 일이지만 내가 했다고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없다. 게다가 회사에선 일한 만큼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다. 열심히 갈아 넣는다고 해서 갈아 넣은 만큼 의 보상이 따라오지 않고, 반대로 어느 날 슬렁슬렁 일한다고 해서 월급을 깎지 않는다. 일본의 어느 재테크 책에는 아예 노골적으로 '회사일 못한다고 월급 깎지 않으니 대충 하고, 내 사업에 집중하라'라고 쓰여있기도 했다. 돈을 떠나서 회사일 자체에서 재미와 의미를 찾고, 업무를 '내 '의 영역으로 너그럽게 끌어안으면 될 일이지만 돈을 떠나서 어찌 회사를 논할 있나. 머릿속의 자아는 파티션을 쳐놓고 회사일과 내 삶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회사를 다니며 힘들고 싫기만 했던 건 아니다. 일요일 저녁이면 다가올 출근을 걱정하며 신음하지만, 순도 일백 퍼센트의 싫음이라면 어떻게 회사를 다니겠나. 일단 회사를 다니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데, '버틴다'라고 밖에 표현할 길 없는 그 시간을 나중에 되짚어보면 내게 약이기도 했다. 하기 싫거나 어렵게 여겨지는 일을 해내고, 맡은 일을 약속한 시간 안에 완수하고, 전화를 걸어 상대를 독촉하고 때론 아쉬운 소리도 해보고, 불편한 사람과 매일 마주하고, 손발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겨우겨우 손발을 맞춰가며 뭔가를 해보는 것. '싫어하는 일을 되도록 적게 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적게 마주치는'게 내가 내린 성공의 정의이지만, 혼자서 일하거나 좋아하는 일만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일들이다. 무엇보다 '먹고살기'의 무게와 온도를 몸으로 터득했다. 출근을 할 때마다 이만하면 나 스스로 벌어먹고 살 수 있겠다는 자긍과, 언제까지 일할 수 있으며 일해야 할까라는 막막함이 공존한다.


핸드폰으로 글을 써 내려가는데, 전 회사 동료들의 단톡방이 울렸다. (물론) 출근하기 싫다는 누군가의 하소연이었다. 조금만 자세히 옮기자면 "퇴사하고 싶으면 퇴사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럴 수가 없다니!"의 외마디 절규. "그런 삶도 살아보는 거야"하고 또 다른 누군가가 답했다. 그런 삶도 살아보는 거야, 노란 말풍선을 따라 읽어봤다. '그만두고 싶다'는 나의 문장 위에 포개지는 말. 오늘도 출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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