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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Sep 21. 2020

가만한 위로


나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영화 <소공녀>는 머물 곳 없는 주인공 미소가 예전 친구들을 찾아가 하룻밤, 혹은 며칠밤을 신세 지는 내용입니다. 겉으로 보면 멀끔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 삶이지만, 안으로 발끝을 살짝 디밀면 그곳에는 삐걱삐걱 거친 소리를 내며 성급하고 어설프게 굴러가는 저마다의 삶이 있습니다. 모양이야 어떻든 어떻게든 굴러가는 일상의 모습을 보노라면 '저게 바로 삶의 본모습이지 않을까'하고 야트막한 위로를 얻기도 하고요. 미소가 찾아간 친구들 중 의 기억에 가장 많이 남은 인물은 아내와 이혼 후 혼자 사는 남자입니다. 굳게 문닫힌 그의 방에서는 밤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미소가 그를 걱정해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고 거듭 청해도 그는 "이게 편하다"며 쉽사리 문을 열지 않습니다. 아침이면 그는 반듯하게 차려입고 직장으로 출근을 합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미소를 향해 환 웃음을 지어보는 것도 잊지 않고요. 햇살처럼 환하게 부서지는 그의 웃음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문득 슬퍼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강민선 작가의 책에서 본 문장을 떠올렸습니다. 출처를 찾을 수 없어 정확하진 않지만, 매우 뜬금없는 상황에서 작가가 눈물을 흘리면서 "이럴 때 나처럼 우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하고 써놓았거든요. 영화 속 그 남자의 미소를 보면서 (그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반듯하게 차려입고 출근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밤새 울다 나온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처럼요.


지난 목요일이었나, 사무실에 앉아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와 깜빡이는 사내 메신저와 핸드폰 메시지를 동시에 처리하는 와중에 막을 길 없는 짧고 굵직한 진심, 욕 한마디가 입에서 튀어나왔습니다. 평소에 조용한 사무실이라 얼른 고개를 들어 좌우를 확인했는데, 다행히 들은 사람이 없는 것 같았어요(혹은 못 들은 척했거나요). 이미 나의 에너지는 바닥을 지나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는 중이지 않을까, 버티고 견뎌야 한다고 나를 다그치는 건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정말 좀 쉬어야 할 때이지 않을까... 회사의 누군가는 힘듦을 토로하는 나를 향해 "아직 힘들려면 멀었다"라고 이야기했지만 그건 그 사람의 사정이지요. 누군가에겐 머리카락 한 올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철근일 수 있으니까요. 집에 돌아오니 막을 길 없는 눈물이 터져서 새벽 세 시가 넘도록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습니다. 아침 출근길에 읽었던 문장을 찾기 위해 페이지를 뒤적이면서요. 그리고 다시 출근을 했지요.


출근하니 눈이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사람이 저에게 떡을 내밀었습니다. 종이 케이스 안에 가지런히 놓인 노랑, 분홍, 연두 중에 연두색을 집으며 나도 모르게 "저 어제 새벽 세시까지 잠을 못 잤어요. 너무 우울해서요."하고 진심을 토로하고 말았습니다. "왜요?"하고 상대방이 내 말을 받았습니다. 숨길 수 없는 말을 받아주는 건 사실은 마음을 받아주는 거죠. 잠깐의 대화 끝에 그이가 답했습니다.

"저는 매일 수면유도제를 먹고 자요."

"수면유도제요? 그런 건 몸에 안 좋지 않아요?"

"그거에라도 기대고 싶어서요."

그거에라도 기대고 싶단 말을 듣는데, 영화 속 삶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들 덤덤한 얼굴로 사무실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일을 하지만, 밤이면 집에서 혼자 의자에 앉아 책장에 눈물을 뚝뚝 떨구는 나 같은 사람도 있고 알약을 삼키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거죠. 적막이 싫어서 밤새 수도를 콸콸 틀어놓고 잔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도 문득 떠올랐습니다.


온기가 당신에게 깃들길  

다시 <소공녀>로 돌아가 볼게요. 미소는 담배와 위스키를 좋아합니다. 청소를 하면 하루에 사만 오천 원을 버는데 담배가 한 값에 삼, 사천 원쯤 하고 위스키 한 잔이 만 오천 원쯤 해요. 그 돈으로 밥도 먹고 생필품도 사고 이런 거 저런 거 다 해야 되는데 담배랑 위스키 몫이 너무 크죠. 미소는 담배와 위스키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데-되려 '담배와 위스키만 있으면 된다'가 정확합니다-주변에서는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미소에게 한 마디씩 해요. "너 아직도 위스키 좋아하니?" "내가 그 상황이면 당장 담배랑 위스키부터 끊겠다"라고요. 나도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아요.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 상황이면 취향을 포기해야 되는 거 아닐까...' 그런데 새벽에 엉엉 울면서 출근길 아침에 봤던 그 문장을 찾으려고 책장을 막 넘기면서 생각하니까, 나는 그 순간에 그 문장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미소도 그랬겠죠. 담배와 위스키가 없으면 안 되는 거겠죠. 그거에라도 기대야 삐걱삐걱 삶을 굴릴 수 있으니까,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어떤 상황이라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가 독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 무언가 때문에 겨우 견디고 버틸 수 있는 걸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여자는 상미를 지나쳐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도어락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상미는 몇 초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러다 집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잠시 서있었다. 상미는 그 여자가 자기에게 뭔가 더 따뜻한 말을 해 주길, 심지어 가벼운 포옹을 해 주기를 기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세희, <가만한 나날>

제가 새벽에 찾아 읽은 문장이에요. 얼마나 쓸쓸하면 얼굴을 처음 본 이웃 여자가 자기에게 다정하기를, 따뜻하기를 기대했던 걸까요. 나도 상미와 마찬가지로 어디에 좀 기대고 싶다고 생각을 했었나 봐요. 울면서 이 문장을 꺼내 읽은걸 보면요. 나의 진심을 토로한 그날의 퇴근길 전철 안, 수면유도제를 먹는다는 사람으로부터 메시지 하나를 받았습니다. 노래 한곡과 그에 덧붙인 짧은 글이었어요. "우울하다고 해서 생각난 노래예요. 저는 잠 안 올 때 이거 들으면서 울어요."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한참 만지작거렸습니다.


어쨌거나 우리의 삶은 굴러가고, 굴러가야 할 테니 각자의 삶에 가만한 위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에 닿는 문장도 좋고, 담배와 위스키도 좋고, 수면유도제도 좋고, 콸콸콸 수돗물 소리도 좋고. 가만한 위로가 각자 꼭 필요한 만큼 우리 삶에 머물고 있어서, 우리 모두 이 삶을 잘 버티고 견디고 씩씩하게 살아냈으면 좋겠어요. 영화 마지막쯤 가서 미소는 단골로 가는 바의 위스키 값이 올랐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미소는 괜찮다면서 덤덤하게 위스키를 주문해요.


그녀가 추천해준 노래는 아직 듣지 않았어요. 깊은 위로가 필요한 순간을 위해 아껴두었습니다. 미소가 고개를 돌려 바라본 창밖에는 마침 나풀나풀 눈이 내리고요. 금세 사라질 눈송이에라도, 귓가에 닿는 순간 녹아내릴 노래 한 자락에라도 기대고 싶은 날들의 합이 어쩌면 인생이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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