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7일 : 따듯한 것들의 기습 공격
아침에 집을 나서려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눈길 끝에 눈물이 맺혔다. "난 우울증이야, 번아웃이나... 아무튼 뭐 그런 거." 중얼중얼. 감정이나 통증에 이름을 붙이고 이렇게 저렇게 정의하려는 나의 꽃말(?)은 '아직은 살만합니다'이다. 지금껏 지켜보니 대체로 그랬다, 나란 사람은. 아버지에게 문득 전화를 걸어 상처 주고 싶은 마음을 꼭꼭 눌렀다. "나 세상 사는 게 힘들어. 또 그럴 거야? 아비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건방진 새끼가 누구 앞에서 힘들다는 얘기를 하냐고 그럴 거냐고. 내가 힘들 때는 단 한 번도 옆에 있어주지 않았으면서,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하라는 빈 말만 평생 늘어놓을 거냐고."
오전에 사찰요리 수업을 마치고 나서려는데 오늘 강의하신 스님이 "지현 씨 책 덕분에 공부 많이 했다, 지현 씨가 내 선생님이다"라는 말씀을 해주셨고, 오랜만에 뵌 한분이 전철역 근처까지 따라 나와서 사인해드린 책을 품에 끼고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셨다. 점심을 거르고 마지막 그림 수업을 들으러 갔는데, 선생님도 나를 보자마자 책 이야기를 또 꺼내시면서 다음 책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해주셨다. 오늘 무슨 날인가? 방구석에 엎어져 "다 힘든 거 알지만 나도 힘든데, 뭐 어쩌라고..." 울먹거리다가 세상 밖으로 나오니 다들 힘을 모아 칭찬을 해주는 기분이다. 얼결에 독자님을 세 분이나 만나다니. 게다가 그림 수업을 마치고 부동산으로 가야 해서 화장실에서 머리를 추스르는데, 옆칸에서 나온- 같은 수업을 들었지만 그간 같은 수업을 듣는지 몰랐던- 한 분이 "작가시죠?"라고 말을 걸어왔다. 본인도 책을 한 권 냈는데, 그림 선생님이 내 얘기를 하셔서 알게 되었다고. 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시느냐고. "실은 너무 바빠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어요, 하하" 쑥스럽게 웃었더니 그녀 스스로도 번아웃이 온 것 같다며, 같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낡은 화장실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눌 줄이야. 중요한 것들은 늘 사소한 얼굴을 하고 있다. 부동산 중개인과의 약속에 늦어 그녀와 다음에 만나기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집 몇 군데를 보고-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드디어 오늘의 첫 끼를 먹기 위해 인근 식당 몇 군데를 기웃거리다 죽집에 들어갔다. 오후 다섯 시가 훌쩍 넘었고, 주인아주머니가 구석에서 늦은 점심인지 이른 저녁인지 모를 식사를 하고 있다가 일어나 나를 맞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홀, 김치죽을 주문하고 멍하니 바라본 한쪽 벽면에는 아주머니의 아이들로 보이는 웃는 얼굴이 잔뜩 붙여져 있었고, 그녀의 취향인지 올드팝이 흘렀는데 대부분 처음 듣는 곡들이지만 몇 곡은 제목을 알고 싶을 만큼 꽤나 좋았다. 주방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듣기 좋았고. 얼마 간 시간이 흐른 뒤 아주머니가 나무 쟁반에 죽과 밑반찬을 반듯하게 담아 내왔다. 쟁반 놓일 곳에 있는 물건을 치웠더니 "고맙습니다"라고 말씀해주셨다. 뜨거운 죽을 한술 뜨니까 몸이 훅 따뜻해졌다. 그리고 죽 위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눈물을 닦으면서 죽을 계속 먹었다. 맛있다, 그런데 눈물이 왜 나지? 너무 따뜻한 게 들어가면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건가? 누가 보면 너무 매워서 우는 거라고 해야겠다, 아무도 안 보니까 다행이지 뭐. 천천히 죽을 먹고 빨개진 코끝을 마스크로 가리고는 이까지 온 김에 좋아하던 까페에 가야겠다 싶었다.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첫 직장이었던 출판사 근처에 있던 곳으로, 팥빙수가 유명해 여름 내내 가고 싶었다. 이제야 가다니. 지도 앱을 들여다보며 길을 헤매는데 어떤 남자가 홍대역이 어느 방향이냐고 물어왔다. 아, 잠깐만요. 지도 앱을 이리저리 돌리는 내 옆에 서서 남자가 "아, 아침 열 시부터 술을 마셨는데 일어나니까 저녁이네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흘끗 본 얼굴이 잘생겼다. 도저히 방향을 찾을 수 없어서 모르겠네요, 하고 뒤돌아서는데 가만. 저 사람 마스크를 안 썼잖아? 까페를 향해 가만가만 발걸음을 옮기는 내 맞은편에서 자전거 두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한쪽으로 몸을 비켰더니 "고맙습니다!"하고 첫 번째 자전거가 쌩긋 웃었다. 까페 구석에 자리를 잡고 천천히 핫초코를 마시는 중에, 아버지의 짧은 편지가 도착했다. 아침에 문득 미워한 내 마음을 사랑으로 돌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