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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May 04. 2017

삶의 잔기술

보다 근사하게


전라도 여행. 잠깐 쪽잠을 자고 새벽 네시경 일어나 어제 못 다 싼 짐을 마저 싸고 집을 나서는 아침.


공항가는 반대쪽 열차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 무지하게 아쉬워하며 - 서울역 행 열차를 기다렸다. 헐렁한 운동화 끈이 눈에 들어와 다시 야무지게 묶는데 문득, 운동화 끈을 묶지 못해서 끙끙거렸던 나의 꼬마시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와 동갑인데도 아직 운동화 끈을 묶을 줄도 모르고 묶을 의지도 전혀 없는, 그렇지만 끈 있는 운동화만 고집하여 주변 사람들을 졸지에 무릎 꿇리는 어떤 이도 생각났다.


그러고보면 삶이란 굉장히 거창한 기술 하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며시 옷을 적시는 가랑비처럼 희미하고 가느다란 기술들의 집합 아닐까. 수능 만점! 고시 패스! 와 같은 대단한 한 방도 소중하지만, 삶을 보다 풍성하게 만드는 비결은 운동화 끈을 꼭 매는 법이라든가 감자볶음을 맛있게 만드는 기술에 있는지 모른다.


이만큼 어른이 되고보니 나는 삶의 여러 잔기술을 겸비한 꽤 풍요로운 어른이더라. (어렸을 때 그렇게 갖고 싶어했던, 껌 씹을 때 입에서 나는 짝짝 박수소리는 아직도 못 갖고 있지만!) 달리는 버스에서 5분만에 화장하는 기술, 어깨와 턱 사이에 전화를 괴는 기술, 떠나는 KTX도 잡아타는 달리기 기술, 친구들의 마음 속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기술,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기술, 세계 어느 나라의 사람들과도 금세 친구가 되는 기술, 아름다운 풍경을 아름답게 렌즈에 담는 기술,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을 알아보는 기술.


터득하는 기술이 늘어날수록 나의 삶도 더욱 근사해지는 것 아닐까. 요즘 내가 배우는 기술은 마음 깊이 감사하는 기술, 낯선 이에게 사랑을 베푸는 기술, 마음의 투정보다는 마음의 진짜 소리에 귀 기울이는 기술같은 것들.


잔기술들 덕분에 조금 더 근사한 내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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