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반지 Aug 28. 2021

포도는 어려워


집에 자주 내려가지 못하는 미안함을 면피할 목적으로 가끔 과일을 보낸다. 다른 건 몰라도 과일 사는데 쓰는 돈은 아끼지 않는다. 돈을 준 과일일수록 좋다고 믿기에 집에 보내는 과일은 여간해선 비싸다. 과일을 받은 엄마는 번번이 "비싼데 이런 걸 왜 보냈냐"하시지만, 말 그대로 사과며 배가 바닥에 굴러다닐 정도로 과일을 홀대하는 집안에서도 내가 보낸 과일만큼은 남김없이 깨끗이 사라진다. 특히 온갖 과일이 쏟아져 나오는 여름이면 질 좋은 참외나 멜론을 꼼꼼히 골라 집으로 보낸다. 이것은 여름을 맞는 의식이자 나의 작은 기쁨 중 하나이기도 한데, 이런 나도 결재를 몇 번이나 망설이게 되는 과일이 있으니 그 이름도 빛나는 샤인 머스캣이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바로 포도다. 당연히 포도도 몇 번 보내봤지만 배송과정에서 무르고 터지기 쉬워 선물한 마음이 무색하게 엄마가 받아 든 포도는 대부분 만신창이 상태였다. 미안함에 그치면 다행이나 배송업체와 또 한바탕 실랑이를 해야 하고, 이건 오롯이 나의 몫이다. 어떻게든 책임을 피하려는 배송업체는 '약간의 알 떨어짐'을 주장하지만, 알 떨어짐과 알터짐이 어떻게 같냐고 몇 번이나 항의를 해야 겨우 부분 환불을 받을 수 있는 데다 이미 이 과정에서 나의 에너지 소모가 상당하므로 포도만큼은 엄마가 직접 사드시라 했었다. 그렇지만 과일이 참 얄궂은 항목인 것이, 남에게 선물할 것은 기꺼이 비싸고 좋은 것을 고르면서도 막상 자기가 사 먹을라치면 선뜻 손이 안 간다. 엄마 역시 그럴걸 알고 있기에, 작년에는 맘먹고 샤인 머스캣을 사드렸다. 한 송이에 대략 2만 원 정도 하는 포도송이 앞에서 나는 몇 번이나 고민했는지.


올여름 역시 나를 깊은 고민에 잠기게 만든 건 샤인 머스캣이었다. 동생 사돈집에서 우리 집에 멜론 한 박스를 보내왔고 답례로 뭘 보낼까 고민하다 샤인 머스캣을 보내기로 했다. 고르고 발송하는 건 어김없이 내 몫이었고, 동생 사돈집에 보낸다고 하니 허투루 보낼 수 없어 고르고 고르다 수출용 특등급을 보내게 됐다. 보내면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송이에 2만 원도 넘는 가격인데 그쪽에서 꼴랑 세 송이 보냈다고 여기진 않을지, 눈으로 보고 보내는 게 아니니 배송과정 중에 상하거나 무르진 않을지, 맛이 있을지 없을지. 그렇다고 지난봄 상견례 때 딱 한번 본 '결혼 안 한 사돈처녀'의 자격으로 전화를 걸어서 "샤인 머스캣은 잘 받으셨나요? 무르거나 상한 건 없나요? 그게 그래 봬도 수. 출. 용. 특. 등. 급이랍니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사돈집에 샤인 머스캣을 보내면서 엄마에게도 사드릴까 물었더니 당연히 엄마는 손사래를 쳤다. 비싸다 비싸.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얼마 전에 포도가 너무 먹고 싶어서 직접 사드셨다고 했다. 맛있었냐고 물어보니 그냥 그랬다 하셔서, 그럼 포도를 사드릴게요 하고 유기농 포도를 보내드렸다. 샤인 머스캣 급은 아니지만 꽤나 비싼 포도였다. 그렇지만 아니나 다를까, 포도를 받은 엄마가 보내온 사진은 예의 그 종이포장과 알맹이가 뒤섞여 곤죽이 된 사진.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업체에 전화를 걸어 "어머니가 포도를 받으셨는데요..."라고 읍소하는 것은 여전히 내 몫이었다. 처음부터 샤인 머스캣으로 기분 좋게 사드리면 될 것을.


오늘 저녁, 작은 카페에서 조촐하게 열린 음악회에 참석했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간간이 불러주는 노래 중에 가수 소히의 <산책>이 있었다.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계실 때, 아버지와 산책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든 노래란다. 노랫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마음이 시큰해졌고 관객 중 누군가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보고 싶어라

그리운 그 얼굴

물로 그린 그림처럼 사라지네

보고 싶어라

오늘도 그 사람을 떠올리려

산책을 하네

따뜻한 손 그리고 그 감촉

내가 쏙 들어앉아 있던 그 눈동자

그 마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사랑을 주던 그가 보고 싶어 지네


외할머니(이하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미 몇 년이 지났지만 엄마는 할머니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거듭 눈물을 흘린다. 할머니에게 못해준 얘기를 하면서, 미안한 마음을 얘기하면서, 그렇지만 할머니가 살아 돌아와도 여전히 못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쓰게 웃는다.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우리 집에 엄마 좋아하는 포도를 많이 사다 주셨다. 자전거 안장에 한 박스를 척 싣고서. 야무진 데가 없어 어딜 가든 웃돈 주고 바가지만 쓰고 오는 할머니가 사다 주는 포도는 별 맛이 없었지만, 할머니가 살아계시는 동안 우리 집엔 포도가 끊이지 않았다. 엄마는 아마 직접 포도를 사 먹으면서, 이제 포도를 사다 주는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또렷하게 기억했을 것이다. 공연이 끝나는 참에 엄마가 카톡으로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내가 다시 보낸 샤인 머스캣 사진이었다. 곧이어 받은 사진은 빈 송이 사진. 앞으로는 고민 없이 샤인 머스캣을 엄마에게 보내야지. 누군가가 엄마를 생각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매거진의 이전글 자기만의 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