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노스의 시간

덜컹덜컹 지하철에서

by 꽃반지

"타노스의 심정을 알 것 같다. 나는"


계단을 오르는 다급한 구둣발 소리 모음집 제 1악장 중 '타노스의 심정' . 환승 지하철을 놓칠세라 급하게 계단을 오르는 중에 내 바로 앞의 여자가 친구에게 한 말이다. 타노스는 영화 <어벤져스>에 등장하는 우주 최강 악당으로, 시간이 갈수록 고갈되어 가는 우주 자원에 대한 해결책으로 우주 생명의 절반을 쓸어버려야 한다는 소위 '타노스의 평등'을 실현하려 한다. 물론 우리의 어벤져스 언니오빠들이 잘 막아줄 것이지만.


지하철 이용시 주의 사항을 보면 1. 무리한 승차를 하지 말 것 2. 승차시 핸드폰을 들여다보지 말 것 3. 폭언, 폭행을 삼갈 것 등의 항목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주의 사항을 의무 사항으로 여기는 것처럼 행동한다. 출퇴근시간이면 이미 꽉찬 객차 안에 어떻게든 발 한짝이라도 디밀어보려고 난리를 부리는 사람들, 사람들이 타거나 말거나 입구를 떡 막고 서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 이미 밀리고 저리 치는 몸의 싸움이 결국은 감정의 싸움으로 번져 서로 욕을 하고 삿대짓을 하는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파리가면 거리의 개똥을 밟아야 진정한 파리임을 느끼듯 (그렇다고 합니다. 파리 가보고 싶어요!) 서울사는 지하철 출퇴근러 중 북새통에 발 한번 안 밟혀본 사람 드물 것이며, '이렇게까지 살아야하나' 하고 자문하지 않은 사람 역시 드물 것이다. (이것이 서울입니다, 여러분!)


지하철을 타면 자주 혐오감에 빠진다. 나는 마음이 급한데 왜 앞 사람은 그토록 느릿느릿한건지 혐오 +1, 다같이 쓰는 객차 안에서 가래침은 왜 그렇게 뱉는건지 혐오 +2, 지금 너 이새끼 내 가슴 위에 핸드폰 올리고 보냐 혐오 +3, 밀리고 밀려 내 손바닥과 밀착해버린 누군가의 엉덩이 혐오 +4. 네, 그래서 총 점수는요~ 이쯤되면 나도 그만 이성의 끈을 놓고 그만 타노스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바치고 싶다. 타노스가 되어버린다.


행복의 3대 조건이 돈, 관계, 건강이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지하철은 완벽하게 행복의 대척점에 있다. 싼 운임, 단절된 관계, 밀리고 치이다가 악화될 것만 같은 몸과 정신의 건강. 실제로 한동안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감에 시달렸는데, 나중에 이유를 알고보니 다니던 회사의 이전으로 10분 남짓한 자전거 출근에서 1시간 40여분의 지하철 출근을 감행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도 약 1시간의 출근을 감내하고 있지만, 나의 소원은 뚜벅이 출근!


워낙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다보니 각종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지하철 이용의 놀라움 중 하나이다. 다짜고짜 외국인에게 너희 나라로 가라고 시비를 거는 사람(주로 중년 남자이다), 지하철 창문에 하염없이 머리를 박는 사람, 쩍벌에 한계란 없다는걸 보여주는 사람, 소리를 지르며 드라마 시청을 하는 사람...


그렇지만 붐비는 지하철이 늘 불편하고 불쾌하기만 한건 아니다. (마른 행주에서 뭐라도 짜봅니다!) 주로 덜 붐비는 노약자석 앞에 서는 편인데,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노인들은 나이가 많다는 것으로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지, 옆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에서 단숨에 친구가 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아이들처럼.


#.사랑의 시작은 사탕에서부터 (지하철 로맨스)
할머니 : 콜록콜록
할아버지 : (사탕을 하나 건네며) 이거 드세요.
할머니 : 어머


#. 답정너
할머니 1 : 오늘 테레비에서 춥다고 했는데 별로 안 춥죠?
할머니 2 : 그러게 말이예요오오.
할머니 1 : 테레비는 순 거짓말 뿐이예요.


아니, 일기예보 조금 틀렸다고 거짓말쟁이로 매수하는 건 테레비 입장에서 억울할 것 같기도 합니다만. 의도는 하지 않았지만 간간이 옆 사람들이 나누는 자연스러운 대화를 같이 들을 수 있는 것도 좋다. (물론 그 대화가 다정하고 따뜻할 경우)


와르르. 작은 문으로 사람들 틈에 섞여 순식간에 지하철을 벗어나면 '후'하고 깊은 숨을 내몰아쉬게 된다.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는가. 나는 지하철에서 내렸지만 혐오감은 아직도 내게서 내리지 않고 잔상처럼 희끄무레하게 남아있다. 지하철에서 타노스로 변신한 나는 별 것 아닌 일로 직장 사람들에게 날카롭게 굴고, 작은 일에 크게 격분하고, 한걸음만 떨어져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을 결코 이해하지 않으려 드는 사람이 된다.


미워하기 싫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환경때문이라면 더더욱. 아침을 시작하는 나의 감정이 조금 덜 격하고 폭력적이기를 바란다. 격동하는 내 안의 타노스를 보면 '고작' 지하철 때문에 이러는건가 싶지만, 상쾌한 바람을 가르며 기분좋게 걷고 또 달리던 10분 남짓의 출근길을 가졌던 기간이 내 인생에 얼마만큼의 충만함을 가져다주었는가를 생각하면, 붐비고 치이는 지하철에서 보내는 2시간은 한 사람을 충분히 악랄하게 만들 수 있는 시간이다.


그나저나 타노스는 어떤 결정을 내렸으려나. 아마 그 성격에 지하철을 부숴버리지 않았을까 싶다만. 아, 우주 최강이니까 출근할 필요가 없겠구나.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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