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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나지행 Oct 23. 2019

#1. 세상이 가르친 꿈과 낭만에 속다.

네! 시한부인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남을 도우라고 배웠고,

꿈과 희망을 가지라고 배우지 않았나?

왜 누구도 성인이 되었을 때, 그 가르침이 거짓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쳐주지 않았는가?


꿈과 희망의 세계로 가득 찼던 나의 어린 시절 세상에 대한 부푼 꿈은 성인이 된 순간 산산조각이 나고야 말았다. 어린 시절 주입되고 세뇌되었던 세상에 대한 벅찬 호기심이 산산조각이 난 순간 나에게 찾아온 건 끊임없는 방황이었다.

그냥 이유모를 힘듦이 계속되었고, 모든 것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어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과연 저 생각이 옳은 걸까?라는 물음표가 되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의 나는 친구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나는 다음 생애에 태어나면 우주에 평화롭게 떠다니는 먼지로 태어날 거야


특별하게 힘든 계기가 있던 것도 아니다.

나는 8 학군의 중심이라고들 말하는 강남의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으니까...

내게 힘든 건 학원, 과외, 시험, 그리고 가끔 오빠가 때리는 거?

아! 초등학교 시절 잠시 왕따를 경험한 적도 있다.

유난히 패션에 열정이 남달랐던  엄마가 입혀주시던 옷은 늘 놀림감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나의 정신적인 방황에 영향을 미친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빠의 그늘에 늘 2인자의 삶을 살았지만 부족함은 없었기에 무난한 10대를 보냈으나,

그 무난함이  세상을 향해 들어가는 나의 면역력을 강하게 만들어주진 못했다.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구나! 그냥 놀자


어린 시절에는 나는 누구보다 뛰어난 줄 착각하고 살았다.

실기와 함께 성장한 나는 연기를 배울 땐 연기를 잘하는 줄 착각을 하였고, 무용을 전공하여 공연을 할 땐 내가 실력이 뛰어난 줄로만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도 뛰어나지도, 뛰어난 아이들 만큼의 노력도 하지 않는 자존심만 강한 바보였는데...

내가 뛰어나지 않다는 걸 알게 된 뒤로는 뭐든 다른 나의 존재감을 스스로 느낄 것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갓 대학에 입학한 당시 무작정 찾아간 댄스 스튜디오다.

그곳에 연줄도 없었고, 무작정 찾아가 제안했다.


"강의 경력은 없어요. 그런데, 수업 한번 시켜보고 반응 좋으면 저 쓰세요."


맨땅에 헤딩! 나의 특유의 장점인데 그 스무 살의 나는 지금보다도 열정이 넘치고 겁이 없는 아이였기 때문에  이리저리 재지 않고 밀어붙이는 성격으로 여자분들 특히 30대 40대들에게 반응이 폭발적이었고, 나는 전임강사가 되었다.


그때의 나는 집에서 겉돌던 때... 아버지의 사업에 문제가 생기면서 부모님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게 되었고, 국가고시를 준비하던 오빠는 예민하여 우리 가족은 전혀 대화를 하지 않았다.

아싸(아웃사이더)였던 나는 당시 해외연수도 가고 싶고, 서포트도 받고 싶은데 받지 못하는 불만만 한가득하여 강의를 하여 버는 돈은 스트레스를 푼다는 이유로 노는데 쓰느라 바빴다.

아니 돈이 모자랄 정도로 놀러 다녔다. 커피를 마시면 스타벅스와 같은 카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차를 몰고 경기권에 예쁜 카페들을 찾아다녔다. 라이브가 있는 카페는 차값이 커피 한잔에 17,0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현금을 백만 원씩 들고 다녔으니까... 실력이나 학업으로 존재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아르바이트로 벌어들이는 수익에 머리에 똥만 찬 사람처럼 살았으니까... 매일 함께한 친구였던 경희 언니의 수입도 좋았기에 우린 정말 매일 물 쓰듯이 돈을 썼다.(나의 20대를 늘 함께 하던 경희 언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에 쓰려한다) 단지 젊음의 한때 겪는 유희처럼  우리의 이십 대는 껍데기의 화려함을 추구하며 살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전락했다.


그렇게 유흥으로 스트레스를 풀며 미래의 불안함을 마비시킨 채 하루하루 살아가던 어느 날이다.

어느 때처럼 강의를 하러 가 몸을 푸는데 다리가 평소 때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무릎이 구부러지지 않았고, 그 증상은 하루하루 더 심해져갔다. 무릎은 풍선처럼 물이 차올랐고, 나는 물을 빼러 다니기 시작했다. 증상은 점점 더 심해졌다. 결국 걷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예민한 성격이었던 나는 스트레스 때문일까 온몸이 아프기 시작했고 일은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정형외과를 찾아갔다. 의사 선생님은 무릎에 염증이 꽉 찼다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셨고, 그날 나는 다리수술을 하고 입원을 했다. 문제는 퇴원 후였다. 차도가 있을 줄 알았던 내 다리는 증상이 더욱 심해졌다.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 

"나는 몸을 쓰는 사람이에요. 수술 이후로 내 다리가 아예 안 움직여요. 되돌려놔 주세요."

마비된 다리를 붙들고 울면서 따지는 나를 보며 의사 선생님은 간호사들에게 말했다.

"경찰 불러!"


아... 세상이 이렇구나.. 처음으로 세상의 냉정함을 알게 된 때였다. 

병원을 옮겼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나는 통원치료를 했는데 밤이 되면 잠을 자는 대신 네이버 지식인 검색을 했다. 나의 증상을 검색하면 그곳에 적혀있는 답변은 더 냉정하다.

네 시한부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 몸이 안 좋으면 마음이 많이 약해진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정말 약 2주간은 내가 시한부 인생을 사는 줄로만 알고 지낸 적도 있다. 병원을 옮겨 한방병원에 입원을 했다. 입원기간 동안 교통사고 환자들이 로테이션되는 것을 아주 오랜 기간 지켜보았다. 입원해 있는 동안 다른 이들은 건강해져서 나가는데 나는 점점 더 몸이 안 좋아진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배우고 일해 본건 연기, 춤 이러한 예체능 분야밖에 없는데 내가 만약 몸을 쓰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깊이 생각하며 병원생활을 했다.

그리고... 결론이 났다.


난 이 세상에서 쓸모가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할 곳이 하나도 없다 라는걸 그때 알았다.
어린 시절 가득했던 꿈과 희망의 나라는 내게 없었다.


소원이 바뀌었다. 

무대 위를 날으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던 그 여자아이의 소원은 보통 사람들처럼 걷는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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