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한 가지를 얻으면 다른 한 가지를 잃더라고...
다음 생애에는 평화롭게 유유히 우주에 떠다니는 먼지가 되고 싶었을 만큼 자유로운 영혼...
한시도 가만있기 힘들었던, 하루 종일 병원에 있는 것이 갑갑해 미치던 아이.
더 이상 링거 꽂을 곳도 없는데....
매일 저녁 7시면 병원 정문을 닫는다.
그전에 빠져나가야만 한다! 머리 좋게 병원 주차장에 어김없이 몰래 차를 갖다 놓았지 헤헤
병원에서 주는 저녁밥을 먹고 산책을 한다고 말해놓고 바로 나온다. 그리고 차를 몰고 가는 곳은 또 어김없이 한강이다.
그 시절 나를 위로해주던 유일한 곳은 한강이었다. 그곳에 가서 특별히 하는 것도 없다.
차 밖으로 나가지도, 산책을 하지도 않는다. 쩔룩쩔룩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일 필요도 없다.
차 안에 앉아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볼륨은 최대치. 그리고 강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야말로 무념무상이다...
나이는 이십 대 인데 멘털은 사십 대가 된 기분이다. 그다지 삶에 희망도 꿈도 없다.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것이 인생사라는 걸 조금 일찍 깨달은 것 같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차례가 없듯이 아픈 것도 친구와 가족과 공유할 수 없는 혼자 감당해야 할 쓸쓸함이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그렇게 오후 7시부터 새벽 6시까지는 오로지 나만의 시간이다
병원에서 검사를 다시 하는 날. 결과가 나오기까지 심장이 쿵쿵 뛸 것 같지만
시한부인 줄 알고 지내던 기간이 있어서인지 모두 내려놓아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도 이젠 두렵지가 않았다.
미래에 대한 조바심 없이 살아본 적이 있는가? 나의 그때는 미래가 없었다. 관건은 내가 앞으로 보통 사람들처럼 걸을 수 있느냐였다. 뭐라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병문안 와주는 친구들도 나에게 큰 위로가 되질 않았다.
그들은 걸을 수 있으니까, 뛸 수 있으니까, 일할수 있으니까...
거울 속의 나만 그냥 병신처럼 보이기만 했다. 외로웠다.
어느 날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나을 수 있다고..
어느 날 병실에 음료수를 가지고와 환자들에게 나눠주는 사람이 있었다.
나에게도 그분은 음료수를 주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 병원의 새로 온 목사입니다."
나는 모태신앙이었지만 오랜 시간 교회를 다니지 않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병실을 나가는 목사님을 불렀다.
"목사님... 저... 기도 좀 해주시면 안 되나요?"
잠시 기도를 해주시고 목사님은 가셨다.
멍 때리는 삶...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현재 추구하는 심플 라이프가 그때 더 쉽지 않았을까 쉽다.
지금은 아무리 심플 라이프를 실천한다고 하나 머리는 심플하지 않다. 내 성격상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 이튿날 기도를 해주셨던 목사님이 나의 병실로 다시 찾아오셔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씀하셨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또 기도 해주시면 나는 땡큐다 하는 마음으로 목사님과 얘기를 나누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갔다.
"자매.. 어제 제가 자매와 기도한 후 꿈을 꾸었습니다. 자매가 매우 슬퍼하는 모습을 보았고요.
자매가 나을 거라는 확신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매와 작정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부모님의 기도가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어머님도 같이 오셔서
작정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모르겠다. 나는 그냥 내가 지금의 이 쩔룩쩔룩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처럼 걸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었다.
"네네 할게요."
그런데 나도 교회를 다니지 않던 상태여서 궁금한 게 많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가 다시 춤도 출수 있다는 확신을 주셨나요?
저 이 상태면 장애인이라... 앞으로 춤은 아예 못 추거든요.
장애인도 다시 춤 출수 있다고 확신을 주셨나요?"
목사님은 나의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되는 에디슨과 같은 질문에 자매는 나을 것이라는 말씀만을 하셨고
나는 15일 동안 원목사님과 내가 다시 걷고 다시 나을 것에 대한 기도를 매일 같은 시간 진행하였다.
기적적으로 다시 걷게 됐지만...
그 이후 목사님과는 관련 없이 병원에서 나의 주치의 선생님은 내 상태의 원인을 도저히 찾지 못하겠다는 말씀을 하셔서 나와 언성을 높이게 되었다. 자신이 없으면 자신 있게 고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지 마시지.. 자신 있게 고칠 수 있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그런 말은 환자에게 얼마나 청천벽력 같은 말인지.. 처음 수술을 했던 그 병원과 같은 케이스로 나는 또다시 절망을 하고야 말았다.
또 병원을 옮겼다. 검사도 다시 시작되었다. 뚜렷한 병명은 나오지 않았지만 증세는 차도를 보였다. 내가 절룩거리지도 않고 보통 사람들처럼 직립보행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의 주치의 선생님은 내게 아이돌과 같은 존재가 됐다. 너무나 잘생겨 보였다.
하지만 그 한줄기 희망과 같은 빛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 입원 중이셨던 아버지가 호흡이 막혀 돌아가셨다. 막 슬프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상황들이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와의 트러블은 지금 이 글에 쓰고 싶지는 않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이기에...
난 요즘도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가 병원에 가시기 직전의 그림들을 꿈을 꾼다.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죄책감과 아쉬움과 너무 선한 사람이었던 그분의 모습이 떠올라서...
순수하고 열정이 가득한 분이셨다. 육군 장교에서 멋지게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하신 분이셨는데 그를 공격하고 이용한 것은 가까운 친구들이셨던 걸로 기억한다.
역시 세상은 선한 사람들이 멋지게 살아가기엔 선한 이를 이용하는 악한 이들이 너무나 많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다시 얻은 내 두 다리가 있어 다시 살아가야 할 삶...
그 여정을 걸어가기 위해 나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하였고, 직접 댄스 스튜디오를 운영하게 된다.
아! 내게 작정 기도를 해주셨던 목사님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모든 교인을 모시고와 함께 추모해주셨다.
내가 그분께 도움될 일도 없는데 뭔가 한없이 베풀어 주셨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내가 보아온 요즘 세상에 매우 드문 따뜻한 나의 추억이다.
나는 그제야 장애인을 벗어났다... 하지만, 아버지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