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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계속 울렁울렁거려서 지하철을 타고 회사를 갈 자신이 없었다.
전날 회식에 도수가 높은 술을 마셨던 탓이었다.
원래 회식 때 술을 많이 먹지 않는데
팀에 좋은 일이 있었고 좋은 사람들이랑 함께 마시다 보니 입사이래 가장 취한 회식이 되었다.
차라리 잠을 좀 더 자고 출근해야 일을 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팀장님께 오후에 출근하겠다고 연락을 드리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잠을 두 시간쯤 더 잤더니 컨디션이 훨씬 나아졌다.
출근하려고 머리를 감고 화장까지 하고 결국 이건 아니다 싶어 정시 출근을 포기했던 터라
슬슬 일어나서 점심 차려먹고 출근하면 될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몸을 일으켜보려는데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동생이 보였다.
동생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동생은 화장품 브랜드 팝업스토어에 일일 알바를 하러 갈 거라고 얘기했다.
***
그즈음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동생에게 ‘오늘은 뭐 했어?’라고 물어보면,
대개 동생은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거나 나가서 한두 시간쯤 걸었거나 또는 자전거를 탔다고 했지만
일일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 날도 종종 있었다.
처음엔 동생이 알바를 했다고 했을 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비록 몇 시간만 일하는 일일 알바일지라도 동생이 경제활동을 하려 한다는 사실이, 무언가를 할 의욕을 가진다는 점이 반가웠다.
동생이 했다는 알바는 대체로 화장품이나 의류 브랜드의 팝업스토어나, 마트나 백화점의 임시 매대에서 판매를 하는 일이었다.
나는 동생이 어떤 일을 했는지, 돈은 얼마를 받는지, 진상고객은 없었는지 물어봤다.
그때마다 동생은 대체로 ‘그냥 물건 팔았어’, ‘한 0만 원 정도?‘ ’그런 사람 없었어.‘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어느 날부터 내 질문에 동생이 대답하는 방식에서 나는 불편한 기시감을 느꼈다.
동생이 회사를 다니지도 않으면서 다니는 것처럼 나와 부모님을 속이고 있을 때
내가 동생에게 회사나 업무, 동료에 대해 물어봤을 때 동생이 내게 한 대답과 유사한 유형의 대답이었다.
평소에 도통 회사와 동료에 관해 얘기를 하지 않는 동생의 직장생활이 궁금해서 가끔 이것저것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의 동생의 대답들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대체로 내용의 ’ 알맹이‘가 없었다
(가끔 굉장히 구체적인 대답을 하기도 했어서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속일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때는 동생이 우리를 속이고 있을 거란 생각은 정말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맹이가 없는 대답의 의미와 이상함을 미처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동생을 의심하는 현실이 슬펐지만 나로서는 동생이 하는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었다.
하루에 오후 몇 시간만 일일알바를 하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알바가 밤에 끝날 수도 있을 텐데, 동생이 하는 알바는 모두 나의 퇴근시간 전에 끝났다.
알바를 하러 나간다는 말에서 느꼈던 반가움이 의심으로 바뀌었다.
***
그날은 특히 더 이상했다.
분명히 아침까지 아무 말이 없었는데,
갑자기 알바를 구했다며 한 쇼핑몰에 설치된 화장품 브랜드 팝업스토어에 일하러 간다고 했다.
동생이 나가고 집에 혼자 남은 나는 고민에 빠졌다.
동생이 지금도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여유가 많이 있지는 않았지만 택시를 타면 동생이 오늘 알바를 한다고 얘기했던 쇼핑몰에 갔다가 회사에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택시를 타고 쇼핑몰을 가는 동안 동생이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의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동생이 말한 것처럼 쇼핑몰의 1층에는 해당 브랜드의 팝업스토어가 열리고 있었다.
팝업스토어는 그리 크지 않았고 눈으로 동생을 찾았다.
동생이 보이지 않아 팝업스토어를 한 바퀴 돌았다.
동생에게 전화를 했지만 동생은 받지 않았다. 한 번 더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더 지체하다가는 회사에 늦을 것 같았다.
쇼핑몰을 나와 택시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15분쯤 지났을 까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동생에게 카톡이 왔다. ‘왜 전화했어?’
나는 답장을 보냈다. ’ 물어볼 게 있었는데 해결 됐어.‘
택시 안에서, 지금도 동생이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더욱 확실해진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씁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아르바이트하러 간다고 하더니 지금 어디냐고, 내가 언제 돈 벌러 나가라고 했냐고, 왜 계속 내게 거짓말을 하는 거냐고
동생에게 울분을 담아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의 날 것의 감정을 표출한다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았고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지만
‘계속되는 동생의 거짓말’ 문제를 동생에게 따져 묻는 일이
그 뒤에 벌어질 상황까지 감안하면 내게도 감정적으로 매우 피곤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또 다른 부분에서 동생이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