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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병원에 몇 번 가지도 않았으면서 몇 달 동안이나 또,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나에게 거짓말을 한 거야?‘
‘내가 너에게 가방에 있던 약을 꺼내보라고 했을 때, 나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한 거 기억나지? 그때, 딱 한마디였지만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했을 거 같아?‘
‘너가 갑자기 알바를 하러 나간다고 했을 때, 내가 너가 말한 그 장소에 갔었던 거 모르지? 지금까지 알바하러 나간다고 한 것도 거짓말인 거야?’
‘가족들이 너에게 나가서 일하라고 얘기하는 것도 아닌데 왜 거짓말을 해? 다른 사람들한테면 몰라도 가족인 우리에게는 거짓말하면 안 되잖아.‘
‘너 부모님 댁에 있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나랑 같이 살고 싶다고 할 때 나랑 약속한 거. 그중에 하나가 병원 가서 치료받는 거잖아.
병원 간다고 거짓말하고 안 갔으니까 너가 약속 깬 거야. 너 다시 부모님 댁으로 내려가. 엄마 아빠한테 너 병원 간다고 거짓말한 거 다 얘기할 거야.
나랑 같이 살고 싶으면 나랑 같이 병원 가고 너 약 먹는 것도 내가 체크할 거야.‘
동생과의 대화의 자리를 만들게 되면 나는 동생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나 아침에 머리를 감을 때, 주말에 잠에서 깼지만 눈은 감은 채로,
상념에 빠질 때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올리고, 덧붙이고, 빼고, 수정했다.
마치 직장인이 보고서를 쓰거나,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는 것처럼
신중하게 할 말을 머릿속으로 다듬었다.
그도 그럴게, 내가 꺼내려는 대화의 주제들은 동생이 꺼려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새롭게 발각된 거짓말과 병원의 진료를 받으라는 권고와 설득이 동생에게 달가울리 없었다.
내가 얘기했을 때의 동생의 반응은 어떨까?
거짓말에 대해 어떤 변명을 할까? 대화를 회피하려고 할까?
‘병원 진료를 받지 않으면 이제 나와 함께 살지 못한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내가 바라는 대로) 순순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겠다고 할까?
내가 불편한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동생이 더 마음의 문을 닫고 가족들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지는 않을까?
동생이 불편해하는 주제를 꺼내서 직면하는 것이 나에게도 힘겨웠다.
상대가 불편해하는 걸 알면서도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냥 없던 일로 모르는 척 넘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병원진료는 제대로 받지 않았지만 점차 자연적으로 동생의 상태와 우울감이 호전되지 않을까?
근거 없는 낙관에 기대보고 싶었지만 슬프게도 함께 살면서 지켜본 동생은 크게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또한 거짓말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동생은 자신이 들키지 않는 거짓말을 하고 있고 생각할 것이고,
자신의 나쁜 버릇을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
힘겹고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렇게 모른 척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용기를 내야 했다.
그럼에도 내가 하려는 대화가 동생과의 관계에 그리고 동생의 상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기에 조심스러웠다.
나는 마음속으로 거의 매주마다 ‘동생과의 대화 D-day‘를 설정했고 미루기를 반복했다.
‘이번 주 토요일에는 나가서 점심을 먹자고 하고, 식사자리에서 얘기를 해야겠다.‘
‘근데 생각해 보니 다음 주에는 내가 친구들과 여행일정이 있잖아. 동생의 반응이 어떨지도 모르는데,
얘기를 꺼내고 며칠간 동생을 혼자 두어야 하는 게 불안한데?‘
그다음주가 되면,
‘이번 주에는 꼭 말해야겠다. 금요일 저녁을 먹으면서 얘기할까?‘ 생각했다가도,
‘이야기를 꺼내면 동생과의 사이가 또 며칠간 불편할 수도 있을 텐데. 지금은 같이 예능도 보면서 밥도 먹고 얘기도 잘하는데… 조금만 더 미루자.‘
또는
‘다음 주는 중요한 회의도 있고 일도 바쁠 거 같은데, 이 얘기를 꺼내서 감정적으로 힘들어지고 싶지는 않아. 다음 주 지나고 얘기하지 뭐…‘
이런 식이었다.
예민하고 불편하지만 하여야 하는 얘기들이었고,
하여야 하는 얘기지만 이야기를 꺼내는 게 부담스럽고 조심스러웠다.
딱히 기한이 정해져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라는 이유로
동생에게 이야기를 꺼내는 날을 미루면서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