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북한에서의 경험을 글로 쓰다 보니 할머니 생각이 나면서 자연스럽게 바늘에 대한 기억도 떠올랐다. 바늘은 내 삶의 한 부분이었다.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작은 바늘이었지만, 그 존재는 내 기억과 감정을 엮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어릴 적, 할머니와 나의 시간은 대부분 바늘과 실과 함께였다. 할머니는 늘 바느질을 하시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때마다 손이 떨리고 눈이 잘 안 보이셔서 내가 대신 바늘구멍에 실을 꿰어드리곤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바늘귀를 들고 나를 진득하게 바라보는 할머니에게 가끔은 투정을 부리면서도, 옛이야기가 재미있어서 바늘귀에 실을 꿰는 심부름을 계속했다.
북한에서 7-8살 이전까지 우리 가족은 가난과 싸워야 했다. 해진 옷과 떨어진 단추는 늘 바늘과 실로 해결되었다. 어머니는 늘 바느질을 하시며 우리 가족의 옷을 기우셨다. "엄마, 난 이런 옷이 싫어. 기운 옷… 가난하다는 게 티가 나잖아."라고 투덜댔던 나의 말에 어머니는 미안한 얼굴로 티 안 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아무리 잘 기워도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도 알겠다고 대답하고 어머니가 손질해 준 옷을 입었다.
어느 날, 물집이 생긴 발을 보며 아버지께 도움을 청했을 때도 바늘은 등장했다. 아버지는 라이터로 바늘을 소독하고 바로 물집을 터뜨려 주셨다. 불에 달군 바늘이 살에 닿을 때 무서웠지만, 순간의 따끔함이 지나가면 실에 묻은 진물이 물집을 치유하리라는 아버지의 말을 믿으며 참아냈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물집은 거의 아물어 있었다. 작은 바늘 하나가 내 아픔을 덜어주었다. 어떤 날은 나무에 올라갔다가 가시에 찔렸을 때도 있었다. 그때도 바늘은 구원투수였다. 아버지는 바늘로 가시를 빼주며 "이렇게 하면 아프지 않아"라고 덤덤하게 위로해 주셨다.
친구와 함께 놀던 시간에도 바늘은 등장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장갑과 모자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너희 엄마 진짜 솜씨 좋다. 어떻게 이렇게 촘촘하게 만들었지?" 친구들의 칭찬을 들을 때마다, 두 분의 바느질 솜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바늘의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동생이나 동네 친구들과 천 조각을 모아 인형을 만들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바늘과 실을 이용해 인형의 몸을 만들고, 작은 옷을 지어 입혔다. 인형을 위한 침대도 만들어주고, 그 위에 작은 천을 덮어주는 놀이가 정말 즐거웠다. 창의력과 정성을 더해 인형 하나하나에 애정을 담아 바느질을 하면서, 나는 작은 세계를 창조해 나갔다.
나에게 바늘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가족의 이야기였고,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길이었으며, 아버지의 따뜻한 위로였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이었다. 나에게 바늘은 사랑과 정성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도 성인이 되고 한국에 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바늘과 실은 여전히 내 마음속 깊이 남아 있다.
바늘은 어긋난 것을 다시 이어주는 힘을 가진다. 비록 작은 상처나 해진 옷일지라도, 바늘과 실은 그것을 복원하고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마치 우리 삶의 어그러진 부분을 다시 봉합하듯이.
요즘은 바늘이 필요 없어 집에 두지도 않는다. 아주 가끔 필요한 일이 있을 때 바늘을 찾아도 어디 있는지 몰라 급하게 편의점이나 다이소로 달려가 일회용으로 쓰고 버릴 수 있는 바늘을 산다. 바늘과 실이 생활의 필수품이었던 때와는 다르지만, 그 작은 도구에 담긴 추억과 사랑은 여전히 내 마음속 깊이 남아 있다. 바늘 하나로 이어졌던 이야기를, 계속해서 따뜻한 기억으로 간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