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우리 집에 고양이가 찾아온 건 우연이었다. 아빠가 길에서 발견한 고양이 가족 중 하나였다. 장마로 어미와 형제들을 잃고 홀로 남았다고 했다. 막내가 키우자고 조르자, 아빠는 그 작은 생명을 품에 안고 집으로 들어왔다. 너무 작고 연약해서 우리는 이름을 ‘쪼꼬미’라고 지었다. 처음엔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던 아이가, 조금씩 마음을 열더니 폴짝폴짝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이름처럼 작고 귀여운 쪼꼬미. 지금은 살이 통통 오르고 덩치도 커졌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쪼꼬미다.
쪼꼬미와의 삶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다채롭다. 고양이는 도도하다는 말이 정말 맞았다. 낮에는 이불속에 숨듯 들어가 하루 종일 자고, 저녁이 되면 마치 세상의 중심이 자기인 양 느긋하게 나타난다. 책상 위에 폴짝 올라가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을 방해하거나, 프린터 위에 자리 잡고 앉아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 영락없이 도도함 그 자체다. 가끔 초인종 소리가 들리면 재빠르게 침대 밑으로 숨어들고, 손님이 떠나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택배 박스나 비닐봉지에는 누구보다 먼저 달려드는 천진난만함도 있다.
쪼꼬미는 사람 마음을 애타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내가 시간을 내어 놀아주고 싶어 하면 딴청을 부리며 무시하더니, 내가 바쁠 때는 슬그머니 다가와 키보드 위에 눕는다. 따뜻하고 하얀 배를 내보이며 눈을 감는 모습은 누가 봐도 사랑스럽다. 그 순간엔 피곤도 잊고 쓰다듬게 되지만, 조금만 더 오래 만지려 하면 슬며시 자리를 떠나버린다. 마치 고양이가 나를 길들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쪼꼬미를 보며 문득 생각이 많아질 때가 있다. 어릴 때 키우던 강아지는 나 같았다. 늘 관심을 요구하고, 사람 곁에 붙어 있으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쪼꼬미에게 그런다. 쪼꼬미는 관심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리를 두고 스스로에게 시간을 준다. 그런데도 가끔 다가와 배를 내어주고 숨소리를 들려준다. 모두가 잠든 밤이면 심심한지 거실 한가운데서 야옹거린다. 관심을 달라고 하는 것 같아 거의 잠이 들었다가도 벌떡 일어나 쪼꼬미를 만져주고 다시 잠에 든다.
그러다 쪼꼬미가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 또 다른 궁금증이 생긴다. 창문 너머 세상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엔 무슨 생각이 담겨 있을까? 고양이의 눈에 바깥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혹시 외롭지는 않을까? 우리와 함께 지내는 것이 괜찮은 걸까?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답을 들을 순 없지만, 가끔 쪼꼬미를 통해 내가 가진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동시에 알게 된다. 대화 없이도, 쪼꼬미는 이미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충분히 전하고 있다는 것을.
쪼꼬미는 대단한 일을 하지 않는다. 먹고 자고 싸고, 또 먹고 자는 것이 하루의 전부다. 그런데도 우리 가족은 그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웃고 행복을 느낀다. 무뚝뚝한 아빠마저 쪼꼬미 앞에서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쪼꼬미가 새로 붙인 벽지를 마구 긁어놓아도 엄마는 '다음에 또 붙이면 돼'라고 웃는다. 막내 동생은 아침에 졸린 눈을 비비며 쪼꼬미 밥을 챙겨주고 다시 들어가서 잔다. 둘재 동생은 서울에서도 쪼꼬미 간식을 골라 본가로 택배를 보낸다. 쪼꼬미의 발바닥조차 귀여워하고, 뭐든 해주려는 우리 가족은 모두 ‘쪼꼬미 바보’가 틀림없다.
쪼꼬미를 보며 깨달은 게 있다. 행복은 거창하거나 특별하지 않다는 것. 존재 자체로 사랑을 주고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 사랑에는 조건이 없고,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만으로 충분하다는 것. 쪼꼬미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팔이 아파도 쪼꼬미가 좋아하는 궁디팡팡을 해주며 웃을 수 있는 가족을 보면 알 것 같다.
쪼꼬미와 함께하며 삶이 조금 더 따뜻해졌다. 한 생명체로 인해 만들어진 단순하고 소소한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그 안에 얼마나 큰 행복이 숨어 있는지. 쪼꼬미는 말없이 내게 그런 것을 가르쳐준다. 사랑은 거창한 게 아니라, 곁에 있어주는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