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의 시간이 있어야 용기가 생긴다

by 강은

지난 1월 10일 졸업식을 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나 역시 남은 날을 지우며 겨울 방학을 기다렸다. 너무 간절해서였을까. 12월 중순에는 얼마 남지 않은 그 며칠이 더 힘겹게 느껴졌다. 그즈음 관람했던 연극과 영화, 그리고 시간을 같이 보내 준 친구 덕분에 연말과 연초를 지나올 수 있었다.


극장이라는 장소에선 오롯이 몰입할 수 있다. 일상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영화 <위키드>의 주인공 엘파바는 자신의 약점에 더는 개의치 않고 세상의 편견을 이겨내고 내 길을 가겠다고 선언하며 Defying gravity를 부른다. 극장 문을 나서며 바로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했다. 영화 <하얼빈>은 독립운동가들의 인간적인 모습이 담겨있다. 좌절에도 한 발자국 나아가는 모습이 울림을 주었다. 연극 <타인의 삶>에서는 ‘진심으로 바라봐 주는 한 사람이 있으면 인간은 변할 수 있어.’란 대사가 나온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드라이먼이 비즐러 앞에 직접 얼굴을 보이는 대신 그 이야기를 담은 책을 써 감사의 서문을 남겼다. 서로를 향한 세심한 배려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끝나고 공연장 밖으로 나올 때면 마음에 잠시 신선한 공기가 머문 듯했다.


세희는 중학생 때 만나 지금까지 이어진 친한 친구다. 지금은 각자 서울로 올라와 서로의 집 근처에 홀로 살고 있다. 잠시 일을 쉬고 있는 세희에게 ‘오늘 자고 가도 되니?’ 카톡을 보냈다. 그 길로 배낭을 메고 하루 이틀 자다가, 어느 주에는 캐리어를 끌고 며칠 더 눌러앉아 있었다. 퇴근하고 친구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는 게 좋았다. 내가 된장찌개를 끓이는 동안 세희는 고기를 구웠다. 함께 먹고, 정리하고, 산책하고, 소파에 앉아 예능 프로를 깔깔거리면 하루가 지나갔다. 유튜브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다 보면 학교에서 겪은 안 좋았던 기억도 조금씩 사라졌다. 친구 집이라는 문을 열면 학교라는 세계를 확실히 벗어날 수 있었다. 덕분에 다음 날 발걸음을 옮겨 학교로 가는 문을 열 수 있었다.


낙관의 시간이 있어야 용기가 생긴다.


소설 수업에서 ‘김성중’ 작가님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최근 친한 지인들과 시간을 보내고 왔다며 운을 뗐다. 자신에겐 육아, 글쓰기, 강의(일) 이 세 가지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이다. 의무를 제외한 시간을 내려면 이 세 가지를 무리해야 하니까 빈둥거리는 시간에 대해 스스로를 질책했다며 말을 이었다.

“봄볕에 돗자리를 펴고 같이 김밥을 먹고 사이다를 마시며 지인들과 두런두런 삶에 대한 논평을 나누다 보니 좋았어. 맞아, 내게는 친구와 인생이 필요하다는 자각이 들더라. 내가 좋은 상태가 되니까, 낙관이 생기니까, 용기는 저절로 생기는 것 같아. 용기가 생기면 어차피 해야 할 일은 하게 되어있어.”


낙관의 시간이라는 게 뭘까? 의무의 굴레를 잠시 내려두고 즐거움을 선택했던 시간이라고 말하면 될까. 그게 영화와 연극의 러닝 타임일 수도 있고, 여행을 계획하며 설레는 순간일 수도 있고, 친구와 함께 보낸 시간일 수도 있다. 결정하기 전에 내게 먼저 물어보려 했다.

‘은우가 지금 원하는 게 뭐야?’

때론 그 선택이 기대와 다르다며 실망했다. 억지로 발을 뗀 만남이 예상 못 한 환희를 선사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해서 세희와 함께 본 영화 <위키드>, 새해를 기리며 먹은 만둣국, 함께 만든 된장찌개, 삼겹살, 파채 무침, 밤에 나눈 대화들. 오히려 그 순간은 너무 좋아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돌아보니 졸업까지 학교 안의 흔들림, 독감, 사회의 혼돈과 슬픔의 시간들 속에 즐겁게 보낸 순간도 뚜렷이 찍혔다. 낙관의 시간이란 지나온 뒤에 깨닫는 여운이지 않을까.


올해 연말은 더디게 흘렀다. 학교는 잠시 셔터를 내렸지만, 뉴스를 지켜보며 여전히 혼란한 시간을 겪고 있다. 응원봉을 흔들며 떼창을 부르는 일도 닿아있지 않을까. 나도 뭐라도 해야지 싶어 나왔지만 되려 거리의 에너지에 충전되어 돌아왔다. 즐겁기 어려운 현실이지만, 그럴수록 낙관의 순간이 필요하다. 이왕이면 의무보다는 즐겁게, 덜 지치고 오래가기 위해, 그럴수록 용기를 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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