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현실
요즘 내 밥 친구는 kbs 예능 <홍김동전>이다. 프로그램에서 멤버들은 동전을 던진다. 앞면인지, 뒷면인지에 따라 그들의 운명은 달라진다. 그러고 보면 많은 예능은 행운, 불행으로 갈라지는 운명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매회 상품과 벌칙이 있고, 똥손이나 복불복 같은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다. 대박과 꽝의 갈림길 속에서 멤버들의 희비가 갈린다. 내가 마음 편하게 웃으면서 볼 수 있는 건 멤버 중 누군가 운이 나쁘게 벌칙을 받더라도 예능이기 때문이다. 번지점프를 하더라도 안전줄이 있을터고, 격한 몸싸움이 있어도 스티로폼같은 완충제가 있을터였다. 안전할거라는 믿음. 그리고 벌칙 후에 생크림을 닦아주는 동료도 옆에 있었다.
교사인 나도 매해 2월은 뽑기의 시즌이다. 학년이 결정되면 새로 구성된 동학년 선생님들과 연구실에 모여서 그해 맡을 반을 뽑는다. 교사들끼리는 어느 학년, 어느 반, 무슨 업무, 동학년 누구를 만나느냐가 한 해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연구실 안은 긴장감이 돈다.
운에 기대 보기도 했다. 오늘의 운세를 보고 행운의 색깔이 들어간 빨간 가방을 일부러 챙겨간 적도 있다. 이번 해에도 나, 아이들, 학부모님 모두가 무탈하기를 바랐다. 나 역시 기피하는 학년, 유명한 왕건이(학생)가 있다는 반에, 민원으로 유명한 학부모가 있는 반으로 자진해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럴 깜냥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도 했고, 굳이 내가 먼저 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만 아니면 돼’라는 분위기. 나도 침묵에 익숙해져 있었다.
지난주(2023.3.7.) 방영되었던 <PD수첩>에서는 ‘아동학대로 고소를 당한 교사들’을 다루었다. 시청하기를 망설였다. 체감했던 요즘 학교의 현실을 마주하기 싫었다. 다 보고 나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그런 상황을 겪지 않은 건, 나는 그저 운이 좋았다는 말밖에는…. 그 어떤 말로 그들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다행히 작년 우리 반에서 큰 사건이 일어나진 않았다. 가르치는 즐거움을 느꼈던 순간도 있었다. 학생들도 처음 만났을 때 약속했던 울타리(선)는 잊지 않고 지키려고 노력했다. 학부모님들도 뒤에서는 불만이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앞에서는 예의를 지키셨고 도와주셨다. 그렇게 나도 연차가 쌓여서 이 일에도 많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같은 학교 안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들렸다. 학부모의 폭언에 지쳐서 상담을 받는다더라, 생활지도가 어려워서 담임이 여러 번 바뀌었다더라. 문제는 멈추지 않고 그 수위와 세기가 더 큰 진폭을 그리며 퍼져가는 듯 했다. 화가 났다. 왜 아직도 교실 전화기는 녹음기능도 없는지, 왜 교육청과 관리자는 상식을 넘는 민원을 다 수용하는지, 왜 뉴스나 댓글에서는 교사가 모두의 적인지, 어디에라도 따지고 싶었다.
교사 커뮤니티에도 힘들다는 글들이 많이 올라왔다. 아이를 남겨서 지도하는 것도, 잠깐 따로 아이를 불러내서 지도하는 것도 모두 ‘아동인권 침해’라고 했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분위기였다. ‘탈출은 지능 순’, ‘조용한 사직’이라는 글도 자주 보였다. 부정적인 공기는 빠르게 전파된다. 바뀌지 않는 견고한 벽 앞에서 “우리끼리라도 이 일에 자부심을 가져봐요.”라는 말은 힘없이 겉돌았다. 내뱉었던 위로의 목소리들은 한숨을 타고 맥없이 돌아왔다. ‘우리의 일이 왜 이렇게 되었지?’
어느 순간 나 역시 현장의 이런 분위기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 같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것들만 보였다. 교실 안에 아이들도 무언가에 지치고 눌려있는 것 같았다. 중학교 3학년을 넘어서 고등학교 수학까지 선행을 하고, 쉬는 시간에도 영어단어를 외우고 학원 숙제를 하는 아이들. 자극적인 영상을 접하는 시기는 점점 빨라지고, 수업 시간은 무엇을 해도 재미없다고 말하는 심드렁한 아이들. 교실 밖을 넘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았다. 사고가 나서 민원이 생기면 안 되니까. 우리 반만 괜한 유난 떨면 안 되니까. 내가 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바닥에서 내 다리를 잡고 자꾸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작년 10월, 학생들에게 교원 평가에 관해 안내하고 있었다.
“교권 나락 갔다던데.”
내 설명이 끝나자, 한 아이가 말했다. 교실은 조용해졌다.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되묻고 그 말이 퍼지지 않도록 별일 아니라는 듯 애써 돌아섰다. 하지만 확인 사살을 당한 기분이었다. 솔직히 마음속으로 아이가 했던 그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PD수첩>에 출연한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정서적 아동학대로 고소를 당했다. 아이에게 ‘수치심’을 주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물론 아직 소송이 진행 중이고, 그 현장에 있지 않았던 내가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하지만 고소 내용을 보면 나에게도 언제든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동학대로 소송이 진행되면, 교사는 자신의 무죄를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고 했다. 사실 관계를 듣고 조정하는 절차가 아니었다. 내가 아동학대를 하지 않았다는, 아이에게 수치심을 줄 의도가 아니었음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고 했다. 코너에 몰렸을 때 교사를 보호해 줄 시스템은 없는 것 같았다. 그동안 교육청과 학교는 문제가 커지지 않도록 막기에 급급했다. 안타깝지만 그들이 교사를 지켜줄 거라는 믿음은 잃은 지 오래였다.
누구든 벼랑 끝에 설 수 있으며, 언제 떨어지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나를 지켜줄 장치가 있는지도, 작동이 되는지도 의심스럽다. 당사자가 느낄 두려움, 홀로 견뎌야 한다는 외로움은 무섭게 다가왔다. 이런 공포 속에서 교사들은 각자 생존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이제 수업을 준비하고 어떻게 가르칠지 논의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처럼 들렸다. 학생이 문제행동을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유명한 왕건이를 필사적으로 피하고, 교실에서 어떤 사고도 나지 않게 지키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그런데 교실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교실은 진공 상태가 아니다. 여러 욕구가 부딪쳐 갈등과 문제는 생길 수밖에 없다. 물론 나도 우리 반의 어떤 아이도 상처받길 원하지 않는다. 내 말이, 내 행동이, 혹여나 상처를 줄까 봐 조심했다. 하지만 내가 무심코 했던 말과 행동도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다. 그것이 불편했다면 대화로 풀어가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무조건 나쁜 것이고, 일어나지 않아야만 하는 것이 최선일까? 내게도 수치스러웠던 장면들이 있다. 어떤 기억은 도려내고 싶을 만큼 강렬하기도 했고, 이미 잊은 것도 있고, 이제는 미소 지으며 떠올리는 것도 있다. 돌아보면 그런 모든 감정들을 느끼며, 깨닫고, 다시 해석하면서 나아왔다. 좌절을 통해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얻고 성장한다.
그러니까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건 ‘넘어지면 안 된다’가 아니라, '넘어져도 괜찮다'라고 말하고 싶다. 교실 안에서만큼은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싶다.
교사들에게도 필요한 건, 날개가 없는 채로 떨어지더라도 바닥에 최소한의 안전 매트라도 있어서 나를 지켜준다는 믿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다시 뛰어오를 수 있다고, 함께 기다려주고 상처받았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동료와 시스템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동 인권’ 존중한다. 하지만 ‘아동 인권’이 누군가에게 무적의 잣대가 되어 악용되고 있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아동 인권’, ‘교권’ 이렇게 진영을 나누고 편을 나누려는 것도 아니다. 아동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처럼 ‘교사의 인권’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교사의 철학이나 지도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적 단죄와 엄벌은 또 다른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소송에 휘말린 교사나 학부모도 힘들겠지만, 교실 속에 다른 아이들도 고통받을 것이다. 지켜보는 관리자와 동료 역시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절차와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아이들에게도, 학부모들에게도, 교사에게도 심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 문제가 없는 교실에 당첨되는 행운은 없다. 왕건이를 피해서 뽑은 반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 교사가 학생들을 지도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는 이상 갈등은 기본값이다. 더 이상 교사 개인의 불행으로만 취급하지 않기를, 적어도 같은 교육 집단 안에서는 서로 상처 주지 않고 함께 갈 수 있기를, 추락하더라도 보호해 줄 장치가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 상처받는 것에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아가서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바라보고, 온전히 자신의 수업을 하기를 바란다.
매해 반복되는 뽑기의 시즌에서 ‘나만 아니면 돼.’라고 생각했던 나의 이기심을 보았다. 타인의 고통으로 얻은 안도는 더 큰 공포를 나았다. 언제든지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상황들에 두려웠고, 현실에 화가 났고, 무기력했다. 내 이기심이 먼저 바뀌어야 하는지, 시스템이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침묵이 아니라, 더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실 속에서 내가 할 수 없는 것도 많지만, 작지만 ‘할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다. 교사로서 잘 지내려고 걸어왔던 내 노력을 스스로 깎아내리고 싶지 않다. 나부터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게 봐주려고 한다. 내 만족이었을 수도 있고, 인정받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연수도 듣고, 연극치료를 받았던 내 과거의 경험 모두 가치 있었다고 내뱉어본다. 지금 동료들이 겪고 있는 모든 것들도 의미 있을 것이라고 감히 전해본다.
정말 가~끔 교실 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연결되었다는 느낌이 찾아온다. 그런 순간을 위해 애쓰는 교사들이 조금 더 편안하게 자신의 교육관을 펼쳤으면 좋겠다.
그렇게 희망을 품어본다. 올해 우리 학교에도 녹음기능이 있는 전화기가 교실마다 설치가 되었다. 전화기가 바뀌었듯이, 사람들이 문제라고 알아차리는 것으로부터 조금씩 바뀔 수 있을 거라고 믿어본다. 날개 없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이 우리 모두의 마음 한 편에 자리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