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장치
이전의 글에서 '첫 만남 프로젝트'에 대해서 썼다. 나는 교사로서 생존하고, 아이들과 한해를 잘 보내기 위해 선배들이 3월 첫 만남기간에 했던 프로그램들을 배웠다. 내 눈에는 그것이 학급 내의 어떤 문제를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장치로 보였다. 그리고 실전에 적용하면서 내 안의 '완벽주의'와 '강박'을 보았다.
모두 3월의 중요성을 말했다. 허승환 선생님은 책 제목부터 <황금의 2주일을 잡아라>고 했다. <행복교실>에서는 아예 ‘첫 만남 프로젝트’라고 이름을 붙여서 선배들이 했던 프로그램들을 전수해 주었다. 그만큼 아이들과 첫 만남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공통점은 우선, 교실 안에서 갈등이 생기지 않기 위해 예방을 철저하게 한다는 것 / 그리고 갈등이 발생했을 때 체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이전 글 '첫 만남 프로젝트라는 예방주사(1) 中
첫 만남 프로젝트는 일종의 예방주사다. 하지만 효과가 뛰어나다는 예방주사를 맞아도 감기 걸릴 수 있다. 좋다고 소문났던 프로그램을 전달해도 갈등은 언제든 생길 수 있다. 이건 내가 첫 만남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못해서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내 말에 집중을 안 해서도 아니었다. (당시에는 몰랐다. 늘 이렇게 부딪치고 겪고나서야 깨달았다.)
아이들은 2주 만에 갑자기 변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내가 무슨 마법사도 아니고…. 3월 첫 2주는 나와 아이들 모두 긴장을 해서 본모습을 살짝 숨기고, 조심스럽게 지낸 것뿐이었다. 교실은 수많은 욕구를 가진 아이들이 매일 만난다. 이곳에서 갈등은 기본값이고,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교실에서 갈등은 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 품는 것만으로도 좀 더 여유로워질 수 있었다. 미리 무슨 문제가 생길까 염려하느라 에너지를 쏟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해결해 나가면 된다고 조금 느긋하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방임'이랑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아무것도 안 하고 관심을 뗀다는 것이 아니다. '예방은 하되,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는 거다. 갈등이 생기면 나와 아이들이 함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만으로도, 나와 아이들을 그냥 믿어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문제들이 좀 해결이 되었던 것 같다.
어쨌든 교사와 아이들 사이에서 서로 믿음을 쌓는다는 면에서 생각해도, 처음 만났을 때 하는 활동들은 중요한 것 같다. 3월 허니문기간에 내가 했던 말을 아이들은 그래도 1년 내내 가장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배들이 그렇게나 3월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았나 싶다.
아이들과 만나는 첫 주가 중요한 것을 알기에, 나름의 공을 들인다. 요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유’다.
1) 준비 : 물리적인 준비 + 여유로운 몸과 마음
물리적인 준비(교실정리, 학생들에게 나눠줄 길라잡이, 학부모 편지 등)가 끝나면, 아이들이 오기 전에 내 몸과 마음을 준비한다. 머레이비언 법칙에 따르면 의사소통에서 말보다 비언어적인 요소 (음색, 표정, 제스처)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최대한 자세를 펴고 편안하면서도 힘 있게 교실에 서 있으려고 한다. 그리고 내 마음에도 자기 암시(?)를 한다. 나는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서 더 매력 있고 멋지다고. 그런 자신감 뿜뿜 마음을 갖도록 스스로 주문을 건다.
아이들이 오면 ‘침묵’을 활용한다. 아이들도 학년이 바뀌고 새로운 환경에 와서 낯설다. 웬만한 아이들도 첫날만큼은 숨죽이고 있다. (물론 간혹 튀는 아이도 있다. 그러면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묻는다. 마치 전혀 놀라지 않은 것처럼 침착하게ㅎㅎ) 어쨌든 첫날 아침, 모든 아이들이 와서 자리에 앉기를 기다린다. 자기들끼리 막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아무 말 없이 가운데에 서 있으면, 곧 아이들도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조용해진다. 그러면 이제 내 소개를 시작한다.
2) 하나를 하더라도 천천히
많은 내용을 2주라는 제한된 시간에 전달하기보다는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려고 한다. 교과 내용 속에도 ‘첫 만남 프로젝트’에서 가르치고 싶은 활동을 재구성해서 넣을 수 있는 요소들이 많다. 그러면 진도에도 좀 자유로우면서도, 내가 가르치고 싶은 것을 전달할 수 있다. 어차피 1년 내내 반복해서 알려줘야 할 기본적인 내용들이다. 한 번에 딱 알아듣고 바뀐다는 건, 어른도 아이도 힘든 일이다. 직접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다시 짚고 알려주기도 했다. 제시된 활동들을 꼭 다 해야 해라는 마음대신, 나에게 맞는 것들을 선택해서 하려고 한다. 한 가지 활동이라도 천천히 제대로.
3) 내가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 선생님도 너희도 완벽하지 않아. 그래도 장점을 더 보도록 할게.
: 나의 울타리 <안전하게 행동하기>, <사이좋게 지내기>
아이들과 처음 만난 날, 내가 말해주고 싶은 건 나의 숨구멍 ‘선생님도 완벽하지 않다’이다. O, X 퀴즈로 물어보기도 했고, 서준호 선생님 <6학년 담임해도 괜찮아>에 나온 포스트잇 활동을 해보기도 했다. 활동의 방법보다도 중요한 건 내가 전해주고 싶은 말, 바로 활동 후의 피드백이다.
활동을 하고, ‘선생님도 완벽하지 않아. 너희도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 그래도 너희의 좋은 모습을 더 봐주려고 하고, 격려할게. 너희도 선생님에게 그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후에 수업활동에서도 완벽하지 않아도 해보자라고 응원을 자주 했다. 나는 이걸 '시도'의 가치라고 부르기도 했다.
두 번째는 나의 울타리, 교실에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선’에 대해 말한다. 첫날 해야 아이들이 가장 잘 기억하고 효과가 좋았다. 지금 나의 울타리는 ‘안전하게 행동하기’, ‘사이좋게 지내기’다. 이것은 나의 기준이다. 어떤 선배들은 ‘존중’ ,‘감사’, ‘책임’ ,‘긍정’처럼 가치들로 제시하기도 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의 기준을 1~3개 정도 생각했고, 아이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녹여내려고 했다. 나는 ‘사이좋게 지내기’라는 울타리를 말하면서 학교폭력예방교육(놀/욕/때/빼/험/따)을 했다. 다음 해에는 여기에 ‘친절하게 말하기’를 더 강조하고 싶다. 이렇게 조정하기도 한다. 다만, 울타리는 명확하게 제시한다. 이것은 기본적인 나의 ‘선’이다. 그리고 학급 규칙은 아이들과 천천히 학급 세우기를 통해 함께 정했다.
첫 만남을 준비하는 마음처럼, 1년 내내 ‘여유’롭게 아이들과 만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아마 불가능한 목표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우아하게 물 위에 떠 있는 걸로 보이지만, 정작 물에 잠긴 아래쪽에선 빠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발을 빠르게 움직인다고 하여, 남몰래 노력하는 사람을 고니에 비유한다. 잔잔한 수면 아래에서 수많은 물장구를 치는 백조들처럼, 아이들 앞에서 여유롭게 서 있으려 운동과 명상을 하면서 몸과 마음의 상태를 확인하며 의식했다. 이 역시 하나의 강박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그런 노력들 모두 소중하다.
둘째 해에 만난 아이들과 <도미노 박수>를 성공했을 때, 다 함께 환호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우리는 실수하는 친구가 있어도 다 같이 “괜찮아”를 말해주기로 했다. 고맙게도 그때의 아이들은 “괜찮아”, “괜찮아”를 말하며 기다렸다. 그래서 그 짜릿한 순간의 기쁨을 얻었다.
이건 교실에 있으면서 느끼는 찰나의 기쁨이다. 사실 이 기쁨을 위해서 한동안 내달리기도 했다. 아이들의 반응과 호응을 의식하고 좋아하는 걸 더 해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또 그것만이 답은 아니었다. 이제는 누군가 실수를 하더라도 괜찮다고 기다려주던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마음과 서로 노력했던 과정을 더 마음속에 품고 싶다.
“수많은 바람은 우릴 멀어지게 할 뿐이지만” 다시, 한희정의 <우리 처음 만난 날>로 돌아온다.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나의 기대로 타인을 판별했던 수많은 바람들은 우리를 멀어지게 했다. 선생님인 나도, 아이들도 서로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우리 모두 실수할 수 있다는 것에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그랬을 때 “우리는 낯설게 느껴지는 비밀들을 밀어냈어.”로 이어지는 다음 가사처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을까? 교사와 학생은 1년이라는 제한된 시간 동안 지지고 볶지만, 때로는 서로에게 기대기도 하고, 위로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의 첫 만남은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