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기 시작한 드라마 <어쩌다 마주친 그대>에서 나왔던 “앞만 보고 돌진하면 함정에 쉽게 빠지지.”라는 대사가 마음을 후벼 팠다. 내가 바로 돌진하는 트럭이었다. 일은 다 저질러놓고 뒤늦게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는….
(※부동산 평가에 관한 글이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인 경험으로 느낀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시작은 친구 A가 집을 살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부터였다. 지난달 A는 최근 판교에 있는 회사로 이직했다. 공연 덕후인 A는 곧 죽어도 서울을 원했다. 그래서 신분당선이 다니는 강남 근처의 집을 알아본다고 했다. 비혼을 선언한 그녀는 아파트는 포기했고, 가지고 있는 돈과 대출을 받아서 빌라를 매매할 거라고 했다.
신발을 사려고 마음먹으면 사람들 신발만 온통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갑자기 내 귀도 부동산 이야기에 쫑긋 세워졌다. 이런 나에게 친구 B는 조언을 했다. B는 결혼을 했고, 서울 자가에 살고 있다.
“빌라는 잘 안 오르잖아. 만약 싱글이라면, 경기도 구축을 사거나 청약을 노려볼 것 같아.”
내가 가진 돈으로 전용면적 59㎡의 분양가를 감당할 수 있는 건 인천 검단정도였다. B는 덧붙였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서울 아파트 청약에 당첨이 되고, 그 사이 결혼 할 사람을 만나서 같이 갚아나가는 게 아닐까라고.
정말 최상의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다. 부양가족도 자녀도 없는 나에겐 서울 청약 당첨은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결혼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결혼을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보다는 내 집에 대한 소망이 간절했다. 서울에서 마음 편하게 살고 싶었다. 전세 만기가 다가올수록 매번 집을 알아보러 다니는 것도 고달팠고, 이사하며 옮겨 다니는 것도 일이었다. 요새 전세사기니 깡통전세란 말 때문에 두려움도 커졌다.
나는 행동개시에 들어갔다. 일단 서울시에서 무료로 해준다는 재무상담을 신청했다. 경기도 구축에도 눈을 돌렸다. 안양에 살고 있는 친구 C의 안내에 따라 평촌, 범계, 안양역 주위를 둘러보았다. 임장 스터디에 가입해서 모임에도 한 번 참여했다. 모임마다 지역을 지정해서 그 동네 아파트들을 돌아다니는 거였다. 혼자 부동산을 가는 게 뻘쭘할 것 같아서 참여했는데, 부동산에 가진 않는다고 했다. 대신 그날 걸음 수 20000보를 채웠다.
광명 재개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모델하우스에 직접 가본 것도 처음이었다. 소형평수가 많이 나온 대단지 아파트였다. 국민평수는 아니지만, 39㎡, 49㎡에 혼자 살만한가 싶어서 다녀왔다. 친절하게 안내하는 직원을 따라 들어가니 사람들이 많았다. 모델 하우스는 환한 조명아래 새것 냄새를 물씬 풍겼다. 16평에 나 혼자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경기도 구축과 검단 신축보다 비싸지만, 풀대출을 받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홀린 듯이 청약을 신청했다.
‘원래 청약 신청해도 잘 안 되잖아. 올림픽 정신처럼 참가에 의의를 두는 거지 뭐.’ 안 하고 후회할 바에는 고! 하며 질렀다. 서울시에서 하는 재무상담은 3회기 동안 이뤄진다. 직장경력이 10년 차가 돼 가지만 돈에 관련해선 나는 무지렁이였다. 상담사가 당연히 알겠거니 생각하고 말하는 용어마다 그게 뭐냐고 묻기 바빴다. 두 번째 상담시간이 되자 내가 지금까지 착수한 일들을 브리핑하듯 읊었다. 확인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상담사는 내가 이렇게 빠르게 뭔가를 진행할 줄 몰랐다고 했다. 왠지 청약에 당첨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말도 했다. 당첨되면 계약금-중도금-잔금으로 이어지는 자금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당첨될 수도 있다는 말에 덜컥 불안해졌다.
“계약 안 하면 어떻게 되죠? 분양가가 조금 비싸긴 했는데, 손해 보고 산 거면 어떡하죠?”
“그 아파트가 지금 분양가보다 더 오를 수도 있고, 내릴 수도 있죠. 앞날은 모르는 거니까요.”
“위험에 대해 미리 파악을 하라고 하셨는데, 어떤 위험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요?”
“그게 경험이고 공부죠. 이러이러한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그러면 어떻게 대처할지 방법을 생각해 봐야 덜 불안하지 않겠어요?”
상담사에겐 원래 보여주려고 했던 청약 관련 PPT가 있었다고 했다. 한 장도 볼 수 없었다. 대신 만약에 벌어질 상황을 묻고 답하며 우리의 휴대폰은 뜨거워졌다.
잠이 오지 않았다. 호갱노노에서도 해당 아파트에 대한 댓글은 뜨거웠다. 오른다, 내린다 상반된 말을 외치는 댓글을 보며 마음은 더 심란해졌다. 내 조바심 속에는 손해 보기 싫은 마음이 있었다. 계약을 했는데 가격이 내려갈까 봐, 계약을 안 했는데 가격이 올라서 안 산 걸 후회할까 봐. 결국은 잘못된 선택을 할까 싶은 두려움이었다.
고등학생 때 우리 가족은 큰 평수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고민하던 부모님을 부축인 건 나였다. 가구들을 다 들여놓아도 휑할 만큼 넓고 깔끔한 새 집이었다. 그 집이 원인은 아니었겠지만, 이사 온 이후로 부모님의 사업은 어려워졌다. 결국 2년도 못 채워서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 일로 내 마음 한구석 부채감이 심어졌다. 괜히 무리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함께 자랐던 것 같다. 기억을 되살리며 내 안 깊숙한 곳에 있던 돈에 대한 불안을 발견했다.
또 일을 저질렀다고 걱정하는 나에게 친구 A는 “당첨되고 걱정해!”라고 말했다. 친구 C는 “직감을 믿고 결정한 거라고 생각해~.”라며 나의 돌진을 긍정적으로 포장해 주었다. 친구 B는 "실거주 한 채는 있으면 좋지." 라며 위로했다.
나는 그 동네로 다시 가보기로 했다. 지하철역에 내려서 부동산 몇 곳을 보곤 들어갈까 망설였다. 첫 부동산에 들어가기 전에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사장님께 몇 마디 물어보았다. 국회의원 누구도 여기를 가지고 있다, 재개발이 될 건데 그러면 입지는 제일 좋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첫 집을 이렇게 가고 나니까 부동산 허들이 한결 낮아졌다. 두 번째 집에서는 한 시간이 넘도록 동네 이야기를 나눴다. (사장님도 많이 심심하셨나 보다.) 세 번째 집, 네 번째 집을 거쳤다. 주변 아파트 몇 곳을 직접 들어가서 살 만한지 구조도 살폈다. 다리는 아팠지만, 부동산포비아를 조금 극뽁한 것 같았다.
문자가 왔다. 예비당첨이란다. 선택을 미룰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부터 나온 걸 보면, 예비라서 다행이었다. 몰라서 불안했다. 아직도 세금이니 대출제도니 모르는 게 많다. 그래도 이제는 혼자서 부동산 문을 두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새로운 나도 마주한다. 앞 뒤 안 재고 돌진하는 트럭도, 막상 일이 커질까 봐 불안해서 잠 못 드는 쫄보도 모두 내 모습이었다. 미래야 알 수 없지만 이렇게 경험을 하고 공부를 하다 보면 더 확신을 가지고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음번엔 당첨이 되지 않았는데 지레 겁을 먹거나, 선당후곰(먼저 당첨하고 나중에 고민한다)도 말고 기분 좋게 당첨을 만끽하고 싶다. 물론, 당첨부터 되고 말해야겠지만! 내 한몸 편히 누울 곳에 대한 소망은 변함이 없으니까.
P.S.
사실 친구 A가 빌라를 사겠다는 말을 들은 날은 글쓰기 첫 정모였다. 에세이강좌에서 만난 동료들과 후속으로 만든 글쓰기 모임이다. 그날 만난 동료들에게 나는 5월 중순까지 책 한 권분량의 초안을 써보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총알이 있어야 뭘 하죠, 란 말을 반복했다. 근래 한 달 동안 글쓰기는 제쳐두고 급작스레 집을 보러 다녔다. 원했던 출판계약이 아니라, 청약이 될지 안 될지를 걱정하며 시간을 보냈다. 정리하면서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삶도 나 자신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한 번 더 체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