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란 단어는 내게도 눈물버튼 같다. 우연히 관련된 사연을 읽거나 듣기만 해도 눈물샘이 터져버리니까. 이젠 아이들에게 선생님 소리를 듣는 사회적인 체면이 있으니 사람들 앞에서 엉엉 울지는 않는다. 대신 붉어진 눈망울을 들키지 않으려 괜히 딴 곳을 응시하고 눈물 말리기 스킬을 쓴다. 나는 엄마를 많이 애정한다. 엄마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랜만에 고향 집에 내려갔다. 본가에 가서 먹는 첫끼가 제일 맛있다. 새콤달콤한 매실 장아찌, 들깨로 무친 머위나물, 웬만한 반찬가게에서는 보기도 어려운 고구마순 김치까지. 엄마가 만든 밑반찬과 나물을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밥을 다 먹고 앉아있는데 엄마가 베란다로 와보라고 손짓했다. 우리 집은 오래된 아파트라 베란다가 꽤 널찍하다. 베란다는 엄마가 가장 애정하는 장소다. 그곳엔 퇴직하고 몇 년 동안 엄마가 모으고 기르는 꽃들로 가득하다. 엄마는 매일 화분에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가지를 치고, 화분을 이리저리 옮긴다. 식물집사 유튜브도 자주 보면서 공부도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종자부터 화분까지 엄마의 손길과 세월을 거쳐 차곡차곡 쌓인 엄마만의 공간이다.
“꽃마다 피는 시기도 다 달라. 한참을 기다려도 안 폈는데 얘가 3년 만에 핀거야. 얼마나 좋은 지 몰라.”
드디어 폈다는 꽃을 보여주는 엄마의 목소리도 한층 들떠있었다. 그리곤 향기를 맡아보라고 내게 내밀었다. 매번 말해줘도 잊어버리는 꽃이름 대신 나는 엄마를 바라봤다. 잔뜩 올라간 광대뼈와 입꼬리를 따라 감출 수 없는 행복한 미소가 보였다.
“근데 계속 만지작거리면 죽어. 쟤들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더라. 중요한 건 애정을 너무 쏟아도 안 돼.”
단호하게 말하는 엄마의 말을 듣는데 갑자기 ‘거리’라는 말이 내 귀에 꽂혔다. ‘엄마의 거리두기’는 꽃, 주변 사람들 뿐 아니라 딸인 나에게도 이어진 것 같았다.
어릴 적 나는 엄마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집이 떠나갈 듯 울었다고 한다. 귀신같이 엄마의 부재를 알아채고 앙앙 울어재끼던 나를 어디에 맡길 수도 없었기에 엄마는 내 옆에 꼭 붙어있었다고 했다. 내가 열 살 무렵부터 엄마는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여전한 엄마 바라기였던 나는 엄마의 쉬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같이 쇼핑도 하고 함께 수다도 떨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를 독차지하고 싶은 내 바람과 달리 엄마는 쉬는 날에도 바빴다. 친구를 만나고 밀렸던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나이가 들어 20년 만에 퇴직을 한 엄마가 다시 ‘전업주부’가 되었을 때, 나는 내심 기뻤다. 본가에 오면 늘 엄마를 볼 수 있을 테니까. 처음엔 혼자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어색할 거 같다던 엄마는 그 말이 무색하게 금방 즐거운 걸 찾았다. 새벽수영을 다니고, 캘리그래피도 배우고, 친구들도 자주 만났다. 무엇보다 ‘아미’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찾았다. 매일 방탄소년단 영상을 챙겨보았다. 엄마는 나와 대화 중에도 수시로 노래 구절을 인용했다. 오랜만에 딸이 와도 무선이어폰을 끼고 BTS영상을 보며 웃고 있는 엄마를 보며, 방탄소년단에게 묘한 질투를 느낀 적도 있었다. (앗, 저도 방탄소년단 좋아합니다..)
‘나이를 먹어도 자식들에게 목매달고 싶지 않아’는 오랫동안 말해온 그녀의 지론이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건 알겠는데, 딸인 나에게도 두는 묘한 거리감에 나는 섭섭했다. 급기야 작년에는 서운함이 발동하여 엄마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 만난다고 서울도 자주 오면서 딸 집은 어쩌면 한 번도 와 보질 않냐는, 난 아직도 엄마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다 큰딸의 투정 어린 메시지.
‘생각해 보니 서운할만하네. 미안해. 엄마에겐 아직도 애기인 줄 몰랐네.’ 다음 날 엄마의 카톡을 확인하고 민망하면서도 눈물이 핑 돌았다. 나이를 먹어도 난 여전히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적당한 거리. 그 적당한 게 원래 제일 어렵다. 거리 맞추기에 요새 내가 하는 방법은 끝장 보기다. 과하거나 부족함의 끝을 본다. 이리저리 덜컹거리며(좀 위험한 방법이긴 하다) 중심을 맞춘다. 엄마에게 보낸 메시지도 그 끝장 보기의 과정이었다. 엄마는 여기저기에 애정을 쏟으면서 거리를 조절했던 것 같다. 엄마의 애정 거리는 가족뿐 아니라 친구들, BTS, 취미생활 그리고 베란다의 꽃들까지 다양했다. (엄마의 애정 거리들은 더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나의 엄마로서만이 아닌 자신의 삶도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제 엄마 반찬도 익숙해졌다. 첫날의 감흥이 줄어든 것이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라는 신호다. 본가에 너무 오래 있으면 나도 툴툴거리게 된다. 슬슬 엄마, 아빠도 이런 내가 귀찮아지는 눈치다. 그래, 역시 사랑하는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싶은 순간이다. 너무 만지작거리면 식물이 시들듯이, 한 곳만 일방적으로 바라보면 사랑도 일찍 식고 질릴 테니까.
여느 때처럼 현관에 서서 엄마와 작별의 포옹을 했다. 그러다 며칠 전 나를 맞이했던 엄마의 표정이 오버랩되었다. 오랜만에 내가 온다고 아침 일찍부터 내가 좋아하는 나물을 준비하고 매실장아찌를 담았을 엄마를 상상해 보았다. 매번 정성스럽게 준비했던 밥상은 엄마가 내게 준 애정이었구나 싶었다.
“엄마, 베란다에 있는 꽃들 중에 내게 어울리는 건 뭐야?”
문득 궁금해져 엄마에게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엄마가 한 화분을 보여주었다. 잎도 작고, 꽃도 작았다.(작아서 나랑 닮았나?) 이름은 ‘풍로초’라고 했다.
“얘는 사계절 내내 언제나 꽃을 피워. 귀엽고 사랑스러워.”
엄마에게 나는 매일 꽃을 피웠던가? 돌아보면 꽃은커녕 한없이 쪼그라들었던 힘든 해도 많았던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매년 혹은 매일 꽃을 안 피워도 또 어떤가 싶다. 이렇게 매일 애정을 주면서 기다리는 엄마가 있으니까 말이다. 엄마는 나를 사랑한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