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대에 계엄령이 선포될 지는 몰랐지.
<죽음을 품은 나무처럼>
계엄령 소식을 들으며 나는 웹툰 작가가 되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 시간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다는 공포. 언제, 어떻게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군부독재 사회가 될 거라는 허무함. 하지만 긴 밤이 지나고 동이 트자, 문득 죽음 이후의 내 모습을 상상했다. 언제, 어떻게 죽을 지 몰라도, 더우면 그늘을 내어주고, 추우면 눈을 막아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1. 계엄령 비켜! … 유튜브 있어서 다행!
“야, 계엄령 선포 됨.”
그날 밤, 잠들려고 누우려던 찰나였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컸을 때 마침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시각은 밤 10시 37분이었다.
처음에는 장난인줄 알았다. 그 다음에는 딥페이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계엄령을 선포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라이브 영상을 유튜브로 직접 보면서, 이것이 현실임을 깨달았을 때 정신이 소강상태에 빠졌다.
계엄령.
그 단언은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한순간에 되살려냈다. 박근혜가 탄핵되지 않았다면 선포하려 했던 계엄령, 19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였던 전두환의 계엄령, 1961년 민주주의를 짓밟았던 516 군사정변의 박정희가 선포한 계엄령. 그 모든 순간들이 오늘 밤 다시 현실이 되려 하고 있었다.
‘계엄령이 시작되면 윤석열 대통령은 임기가 끝날 때 순순히 대통령 직을 물러날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스멀스멀 자라났고, 군부독재에 대한 우리나라 역사 회고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나라는 아직 군국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거잖아.
불과 어제 군국주의 잔재가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문제에 대한 글을 썼는데, 이건 뭐, 잔재가 아니라 아직도 지속중인 현재진행형이었다. 이 단어에 누가 자꾸 생명력을 불어주는 건가 싶었더니, 그게 지금 우리나라의 대통령이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와중 가장 무서운 말은 윤석열 대통령의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라는 말이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제로 힘들어 하고 있지, 북한으로부터 자유와 행복을 약탈당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종북 반국가 세력? 예산안 편성이 마음대로 안 되니까 빡쳐서 계엄령 선포한 거 아냐? 경제 위기를 군사정치로 덮고 다음 대통령에게 떠넘기려고 하는 거 아냐? 아예 독재정치까지 하려는 거 아니야?
친구와 실시간으로 통화 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카톡으로 잠을 깨우고 계엄령 선포 사실을 알리며, SNS를 실시간으로 살폈다.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자유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가 덮쳐왔다.
친구와 나는 군사독재 실현에 대한 두려움에 울면서 정보를 찾았고, 언론과 출판을 통제 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계엄 포고령 전문을 읽고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이 언제 삭제될 지 몰라 머릿속에 우겨 넣느라 바빴다.
그 와중에 어떤 멍청하고 악질적인 놈이 만든 가짜뉴스에 낚이기도 하고, 선량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만든 가짜뉴스 정정 글에 깨닫기도 하면서 완전 정보에 대한 완전한 패닉이 거세졌다.
물리적인 추위와 정치적 냉기에 덜덜 떨면서 내가 찾은 답은 유튜브 라이브 시청과 외신의 실시간 보도였다. 인터넷 창을 3~4개 열어서 왼쪽 화면에는 국회의사당을 생중계하는 라이브를 2개 틀어놓고, 오른쪽 화면에는 BBC, CNN, 구글 뉴스 그리고 챗GPT를 켜놓고 영어, 일본어를 번역하며 외신보도를 검색하고 기사를 스크랩 했다.
외신은 BBC가 실시간 트윗 마냥 속보를 지속해서 올려줘서 큰 도움이 됐다. CNN은 BBC보다 조금 늦었고, 로이터통신까지는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국내 언론의 경우에는 계엄령에 관한 뉴스는 진보, 보수 상관없이 올라오는 것들을 다 보려고 했다. 언론사들이 실시간으로 보도하기 바빠서 오랜만에 있는 그대로의 소식을 전해받을 수 있었다. 사진의 경우는 정식 언론사의 것이 아니면 믿지 않았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완장한 남자 군인이 맨몸의 여자 아나운서에게 총을 겨누는 장면,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어 의사당으로 들어가는 모습, 그리고 그들을 막아서는 군인들.
국회에 들어간 국회의원의 보좌관과 직원들이 군인들이 못 들어오게 문을 지키는 영상도 보았다. 국회에 결의안 하나가 올라오기 위해 얼마나 오래 걸리고, 어떠한 법적 절차들을 밟아야 하는 지 지켜보고 찾아보면서 심장이 너무 쫄렸다. 민주주의가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그냥 형식 따위 집어치우고 하면 안 돼?” 라고 초조함에 내뱉은 말에 “근데, 형식이 중요하긴 해.”라고 친구가 단칼에 헛소리를 베어줬다. 덕분에 나도 “그건, 그렇긴 해”라고 급 차분해 질 수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단순한 형식이 아닌, 수많은 희생으로 만들어진 민주주의의 근간이란 것을.
골든타임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황금보다 더 귀한 시간을 놓쳐서는 안 됐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게 되면 군부독재라는 어둠 속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생명이 끝나거나 소생 가능하거나 극단적인 순간이었다.
친구와 분노를 공유하며 “도대체 결의안은 언제 올라오냐?”고 소리쳤다. 계엄령이 뭔지 모르는 듯한 댓글과 몇몇 주변 반응에 현타가 오기도 했다. 그러나 기다림 끝에 마침내 결의안이 올라왔고, 참석한 의원 190명이 만장일치로 계엄령 해제 결의안을 동의했을 때, 나는 “됐다!”라고 외쳤다. 큰 안도의 한숨과 함께 얼굴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국회의원들이 운동권 출신들이 아니었다면? 이런 상황에 있어서 경험이 없었다면? 나처럼 감정적으로 흥분한 나머지 절차를 무시했다면? 창문을 깨고 국회에 진입한 군인들이 본회의장을 장악 했다면?
결의안은 가결 됐지만, 군인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따뜻한 물을 끓여와 군인들이 해산할 때까지 계속 지켜봤다. 평소 나라와 시민들을 지켜준다고 바라봤던, 고마운 존재로 여겼던 군인들이 이제는 총구를 같은 나라 시민들에게 겨누고 있었다.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에게 총구를 겨눈 모습은 충격을 주었고, 나도 모르게 “군인과 경찰 존나 싫어.”라는 말이 자연스레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래서 투표를 장난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한 순간의 선택이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생생하게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날 밤, 나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지, 또 얼마나 위태로운 균형 위에 놓여 있는지를 실감했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체제가 아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말하고, 표현하고, 꿈꿀 수 있는 기반이다. 그런나 그런 기반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현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나 잠든 사이에, 피를 먹고 자라난 민주주의가 또 다시 꺾여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버리면 어떡하나 싶어서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동이 뜨고, 날씨도 눈치를 보는 지 흐린 상태 속 도시가 참으로 조용했다. 이 악물고 목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참는 것 마냥 조용했다.
택시를 타고 라디오에서 해제된 계엄령에 관한 뉴스가 보도될 때, 원래 같았으면 혼잣말로 욕하고 투덜거릴 지방의 어느 기사님도 승객도 아무말 하지 않았다. 다들 조용히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래서 인생을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는 거구나 싶었다. 그동안 웹툰 작가가 되기 위해 밤낮으로 그림을 그리고, 스토리를 구상하고, 수많은 습작을 해온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 모든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이런 체제 속에서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결국 사상누각(砂上樓閣)을 쌓는 것처럼 허망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2. 죽음을 품은 나무가 되고 싶다.
‘인간사 진짜 피곤하다….’
마냥 쉽게 누군가를 미워만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국회에서 철수하면서 연신 사과하는 군인의 모습을 보고, 유서를 쓰고 투입된 곳이 국회였을 때 느낄 군인들의 허망함을 생각해보니 슬펐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힘든 훈련을 한 것이 한 미친 대통령의 반란행위에 강제 투입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러기 위해 지키고자 했던 시민과 국가를 등지고 맞서야 했을 때 얼마나 참담했을까. 군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같은 시민이자, 동년배인 그들을 외면하지 말고 두 눈 부릎 뜨고 살아서 지켜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직 죽기에는 너무나 나쁜 놈들이 많다. 그 나쁜 놈들이 인생 종치는 걸 보고 죽어야 여한이 없을 거 같다는 분노가 힘이 되어, 늘 오늘까지만 살고 죽고 싶다고 염원하던 나의 바람, 죽을 날을 뒤로 미루게 했다.
그리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날이 오면, 수목장을 하여 나의 죽음을 나무가 품어줬으면 좋겠고, 죽어서 그런 나무가 되어, 더우면 그늘을 내어주고 추우면 눈을 막아주고, 비가 오면 빗물을 조금 덜어주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줄 수 있는 뭔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사람이 되어, 이야기로, 그림으로, 사진으로, 생각으로. 웹툰이라는 매체로, 나처럼 계엄이라는 공포에서 욱하기도 하고, 침울에 빠지고, 감정적으로 방황하는 이들이 있다면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키보드를 두둘겼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한 그루의 나무가 누군가에게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오늘도 뉴스를 스크랩 할 것이다. 외면하지 않,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알아야 할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지 않고, 어제보다 조금 더 차가운 머리로 가슴은 뜨겁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