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헤아릴 수 없는 깊고 넓은 마음

by 심루이

박스 180개를 힘겹게 중국에 보내고 원심이와 친정에 왔다.


우리 집과 가까웠다는 연유로 결혼하고 친정에서 잠을 잔 적은 거의 없었기에 내 딸과 함께, 내가 자란 집에서 사는 시간은 특별하다. 곧 끝날 시간이라 더욱 그렇다.

많은 순간, 내가 친정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서랍 귀퉁이에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오빠에게 중학생인 내가 쓴 장문의 편지를 발견했을 때.
한 달째 기침으로 골골대는 딸을 위해 도라지, 배, 생강, 대추를 한 냄비에 넣고 바글바글 끓이고 있는 엄마를 보았을 때.
전방 주차가 서툰 딸을 위해 늦은 밤, 아파트 정문에서 추위를 견디며 서성이고 있는 아빠를 보았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친정 곳곳에 자리한 낡고 낡은 물건들을 보았을 때 그렇다.

결혼한 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었으면서 나는 금세 까먹었었다.
매일 새로운 물건들을 주문하고, 쓸데없는 물건들로 신혼집을 꾸미면서도 몰랐다.
가볍게 떠나야 한다고, 비우면서 살아야 한다고 멀쩡한 물건들을 별 고민 없이 다 내다 버리면서도 정말 몰랐다.

친정에 오니 모든 게 낡았다.

책상과 의자, 앞치마와 책장. 모든 게 한세월이다.

생각 없이 버리지 말걸, 내 것만 새것으로 채우지 말걸, 나는 뒤늦게 후회한다.

그 후회를 -왜 이렇게 구질구질한 걸 계속 가지고 있어- 라는 칭얼거림으로 덮어버리는
나는 영원히 철들지 않는 막내딸이다.

이 집에서 참 오래 살았다.
오빠와 나는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노래를 듣고, 책을 보고, 꿈을 꾸었다.
오빠와 나는 이 좁은 집에 참 자주 친구를 불렀고, 엄마는 맛있는 음식을 해줬고, 우리를 베란다에서 아주 오래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난방의 손길이 제대로 닿지 않아 문을 열기조차 무서운 오빠 방에서 나는 오빠가 이곳에서 보낸 시간을 생각한다. 그리고 오빠가 떠나고 이곳에서 나의 부모님이 보냈을 시간을 생각한다. 자식이 떠난 자식의 방에는 무엇이 남는가. 나는 옷깃을 여며본다.

아직까지 내가 엄마가 되었다는 것보다 나의 부모님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무뚝뚝하기만 했던 우리 아빠가 심이를 위해 이불 속으로 숨고, 목청 높여 동요를 부르는 순간에도 그렇다.
전철에서 아빠에게 자리를 양보해주는 사람에게 고마워해야 하는데 야속하기만 하다.
왜 아직 청춘인 우리 아빠에게 자리를 양보하냐고 항의하고 싶다. 속절없이 빠르게 흘러가버리는 시간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 나는 마트에 들려 심이를 위해 딸기를 샀다.
병원을 들리고 돌아오는 길, 엄마는 마트에 들러 나를 위해 도라지와 생강을 샀다.
엄마는 딸을 위해, 그리고 딸은 또 자신의 딸을 위해 지갑을 연다.
나는 딸기를 씻고, 엄마는 차를 끓인다.

전해지는 사랑의 온기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날 먹먹하게 하는 그 낡음이 그래도 나의 부모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면 좋겠다.
모녀 삼대가 함께하는 친정에서의 시간이 부디 느리게 흘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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