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역사에 당당해지기
베이징에서 자주 걸으며 나라는 사람에 대해 들여다보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부작용은 ‘흑역사’들이 자주 소환된다는 점이다. 나와는 참 달랐던 친구와 수다를 떨면서, 처음 술에 한껏 취한 날, 줄곧 타고 다니던 3호선이나 버스 402 안에서, 뭐가 맞는지도 모르면서 용감하기만 했던 신입 사원 때,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저지르고야 말았던 수많은 사건 사고들과 실언들. 바쁠 때는 모두 잊고 살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선명해진 시간들도 많다. 그럴 때면 짙은 후회와 함께 자연스레 이불킥이 이어진다.
아 다시 돌아가고 싶어.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야. 내 흑역사를 모두 지우고 싶다고!
자주 가는 방초지 쇼핑몰 근처에 르탄 공원(日坛公园/일단공원)이 있다. 명청(明淸)시대에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장소로, 베이징의 유명한 고적인 우탄[五坛] 중 하나이며, 명나라 때인 1530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1951년에 확장 공사를 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베이징 10대 공원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데, 평일의 르탄 공원은 한가롭다.
르탄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3분 정도 달리면 카페 <il Gatto coffee/一咖多咖啡>가 있다.
중국어로 흑역사는 '黑历史(hēi lìshĭ)'다. 문자 그대로 검은 역사. '对过往不想提起的经历的称呼, 언급되지 않았으면 하는 지난 과거'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산책의 끝에는 이런 의문이 남는다. 그래서 그때로 돌아가면 뭐가 달라질까? 나는 정말 지금의 바람처럼 더 나은 선택과 행동들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나이에 걸맞게 여물지 않았던 그때의 내가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선택과 행동을 나는 아마도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부끄러울 것이고 상처받을 것이다.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때로 이를 악물로 버티고 때로 너무 힘들어 네게 손을 내밀 것이다. 그 상처들은 조금씩 아물어 지금의 내가 되겠지.
그러니 그 흉터가 없는 나는 내가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사랑하는 건 완벽한 과거와 자아를 가진 한 사람이 아니다. 어설프고 서툴러서 실수를 반복했던 너, 예전 관계의 다양한 상처들에 아파하고, 상처를 주고받았지만 결국 견뎌내고 내 앞에 서 있는 너만의 상흔을 가진 지금의 너다.
그래서 나는 ‘새 애인에게 네 과거를 시시콜콜 털어놓지 말라’는 연애의 불문율을 믿지 않는다. 과거를 숨기고 싶지 않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싶은 이에게 내 과거의 아픔들을 쉽게 재단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세상의 모든 파도를 잘 넘어 당신 앞에 당당히 서있는 지금의 나를 대견하게 여겨달라고 말하고 싶다.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과거의 깊은 상처가 자연스럽게 아물어 작은 흉터가 되는 그 시간들을 함께 걷자고, 그 흉터를 가만히 바라보며 미소까지는 아니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그날까지 함께 하자고.
가끔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본다. 그중 하나가 ‘아물다’다. 이 단어는 뜻도 아름답지만 어떤 식으로 발음해도 귀엽다. 아물다. 아-물다. 아물-다.
‘부스럼이나 상처가 다 나아 살갗이 맞붙다’
시간의 틈들은 그렇게 맞붙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베이징_도시산책
도시를 산책하며 마음을 산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