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루이 Nov 24. 2021

엄마는 백수가 아닙니다.

과거의 나와 내 일을 설명하는 일

어쩌면 백수는 밀려오는 불안의 파도를 계속 넘으면서 버티는 서퍼와 같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너무 큰 불안이 밀려와서 물속으로 처박히기도 하고, 때로는 넘실대는 불안 위에서 잠시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는 서퍼 말이다. 유난히 파도가 큰 날이 있거나 잔잔한 날이 있을 뿐이지, 파도가 아예 밀려오지 않는 날은 결코 없다. 그러니 백수 생활의 가장 큰 덕목은 밀려오는 불안함을 다독이면서 매일 살아내는 일일 것이다. 


모범피, <백수가 된 모범피의 각성기>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갑자기 자신의 직업에 대해 말해보자고 하셨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내 직업란에 들어가는 단어는 언제나 ‘회사원’이었다. 과감하게 퇴사를 했으니 회사원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앞에 앉은 친구들이 대답을 이어간다. “선생님이요.”, “필라테스 강사로 일해요.”, “엔지니어에요.”, “공무원이에요.”. 그들의 직업이 나를 더 작게 만들고 있다. 당황한 나는 더듬으며 “저는 엄마? 아니 중국어 공부하는 학생인가 봐요”라는 모두를 웃게 만든 대답을 하고야 말았다. 무안해서 나도 따라 웃었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 괜스레 슬퍼졌다. 대학교 졸업 전에 취직해서 강산이 변하는 시간 동안 청춘을 불사르며 회사에 다녔건만, 현재의 나는 그저 ‘백수’ 일뿐이라는 현실에 온몸이 쪼그라든다. ‘역시 아빠 말씀대로 교직 이수를 하거나 전문직을 택했어야 했어’라는 과거의 나를 원망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존감이 떨어지니 이야기의 결론도 이상해진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서 영혼 없이 아이 등을 토닥이면서 나는 그 질문과 대답을 반복해서 생각했다. IT 기업에 다녔다고 할 걸 그랬나? 홍보 전문가는 어땠지? 왜 바보처럼 그런 대답을 했을까. 속상한 마음에 이불 킥을 반복하며 PR, IT, 홍보 등의 키워드로 사전을 뒤적여 몇 개의 문장을 만들었다.


-저는 대학 졸업 이후 IT 기업 PR 부서에서 오래 일했어요. 기업의 이슈나 새로운 서비스를 외부에 알리고, 기사의 형태로 소통하고, 간담회도 자주 개최하는 일이에요. 회사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죠.


다음에 누군가 물어볼 때를 대비해서 몇 개의 문장을 달달 외웠다. 회사의 민감한 이슈들을 제일 먼저 감지해 발 빠르게 처리하고, 새로운 서비스를 멋있게 포장해서 외부에 잘 알리는 일. 회사 플랫폼을 이용해서 자신만의 성과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취재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일. 국내만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도 분투하는 회사 서비스를 진심으로 응원하며 일을 했었다. 무엇보다 정말 멋진 동료들이 있었다. 퇴사 후에도 항상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 무의식 중에 ‘우리 회사’라고 언급하는 스스로를 자주 발견하고 문득 회사와 내 일을 정말 사랑했구나 느낀 적도 여러 번이다. 


사랑했던 일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과거의 선택을 탓하는 스스로가 못나 보였던 그날 이후, 나는 누군가 나의 과거를 궁금해하면 이불 킥을 하며 외웠던 문장들을 속사포 랩처럼 쏟아낸다. 외웠던 문장도 문장이지만 제일 빠르게 중국인을 이해시키는 방법을 터득했다. 한국의 알리바바. 거기 홍보실이요. 이 두 문장이면 모든 게 해결되었다.      


그리고 베이징에서 처음으로 전업주부로 지내면서 알게 됐다. 전업주부는 결코 백수가 아니었다. 제일 바쁘게 중요한 일을 해내는 전문가였다. 손을 놓고 있으면 이틀이 채 되지 않았는데 집은 돼지우리로 변한다. 치운 건 티가 나지 않고 치우지 않으면 티가 ‘너무’ 나는 이상한 일이 바로 집안일이었다.    




학교생활을 마무리하고 어느 정도 중국어를 하게 된 나는 ‘도시 산책자’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스스로에게 붙이고 도시 산책을 시작했다. ‘적자생존’을 ‘적지 않으면 죽는다’로 인식하고 있는 나는 기록 중독자답게 찾아낸 정보와 직접 찍은 사진, 감상과 애정을 곁들여 매일 산책기를 썼다. 기록하는 행위는 마주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촘촘하게 바라보고 더 다정한 시선으로 다가가게 했고, 순간순간에 몰입하게 해주었다. 그러니 기록, 아니 기록하고자 하는 마음은 어느 장소에서건 내 영혼을 흔들어 깨웠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베이징이라는 도시가 더 아름다워 보였고 하루하루의 평범한 시간들이 무척 특별해지기 시작했다. <기록하기로 했습니다>의 김신지 작가의 표현처럼 ‘하루하루가 낱알처럼 살아’ 있었다.


나는 그저 모범생이었다. ‘자신의 인생은 가이드북을 따라 하는 여행같았다’는 너무나 공감 가는 고백을 한 작가 ‘모범피’의 문장을 읽는다. 


호흡이 긴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글을 쓰고, 글을 쓰면서 나와 대화도 하고, 좋은 음악도 찾는다. 신기하게도 계속 무언가를 하면서 나에 대해 더 잘 알아가고 있다. 그동안 나는 너무 남의 목소리에 집중해서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나만의 방을 갖고 나니,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시간을 충만하게 보내는 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잠도 줄여가며 하는 스스로는 ‘과로사할 백수’ 자체였지만, 그 충만한 시간들이 모이니 잊고 지낸 꿈과 새로운 꿈이 모두 보였다. 쌓여 가는 취향과 일상의 기록들은 어제보다 조금 더 즐거운 '오늘의 나'로 만들어 줬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뭔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었다. 다음에 직업을 얘기해야 한다면 오글거리는 손발을 부여잡고 ‘도시 산책자’라고 말해보고 싶다. 상대방은 농담인 줄 알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진짜 지금의 나고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모습이기에.  

 

엄마의 공부.
그리고 도시 산책, 베이징 골동품 시장, 판자위앤


----

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이전 17화 차라리 비행기를 탈 걸 그랬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