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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Dec 05. 2021

차라리 비행기를 탈 걸 그랬어

염증 하나에 128만 원을 썼다.

건강하시기를. 오랫동안 이 말을 마지막 인사로 써왔다. 완전하고 모호하고 순진한 데다 공평하지 않은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늘 마음을 담아 썼다. 당신이 내내 건강하기를 바랐다. 지금도 당신의 건강, 그걸 바라고 있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우리가 각자 건강해서 또 봅시다. 언제고 어디에서든 다시. 


황정은, <일기>  


아이가 조금만 아파도 불안한 마음에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는 엄마들이 있었다. 귀찮은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었는데, 큰 병에 걸린 게 아니라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중국 의료 기술을 신뢰하기 힘들기도 하거니와 언어가 자유롭지 않은 외국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의료 혜택이 제한적인 것 또한 사실이지만 그래도 베이징은 명색이 대륙의 수도가 아닌가!!! 긴박한 수술이 아니라면 베이징에도 병원과 약국이 있는데, 뭘 굳이. 나는 한국어 통역이 가능한 동네 병원에 다니기로 했다. 


때는 바야흐로 베이징에 온 그 해 가을, 별 탈 없이 타국 생활에 적응하나 싶던 아이가 갑자기 귀 아래가 아프다고 울면서 사건은 시작됐다. 병원에 갔더니 이하선염이라고 했다. 예전에 한국에서도 한 번 걸렸던 터라 큰 염려는 하지 않았다. 항생제 먹고 좀 쉬면 나을 거라 생각하며 지나치게 선명한 핫 핑크색 항생제를 받아왔다. 그런데 웬걸, 항생제를 먹어도 낫질 않았다. 수치 확인을 위해 매일 병원에서 피검사를 했다. 그러길 며칠… 먹는 약이 잘 듣지 않으니 항생제를 주사로 맞는 게 좋겠다는 처방을 받았다. 계속 되는 피검사로 인해 다섯 살 심이는 바늘 트라우마가 생긴 모양이었다. 바늘만 보면 발작을 하듯 울어 젖혔다. 


하루는 간호사가 아이 혈관을 도무지 찾지 못했다. 왼쪽 팔에서 시작해 오른쪽 팔, 왼쪽 다리, 결국 오른쪽 다리까지 바늘을 찌르고서야 가까스로 성공했다. 아이는 울다가 거의 실신할 지경에 이르고, 세 명의 간호사들과 함께 아이의 몸을 힘껏 잡고 있던 나도 그만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엄마니까 강해져야 돼’라고 입술을 깨물었지만 2주간 누적된 슬픔과 화, 무기력이 한 데 버무려져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보던 중국 간호사는 내 등을 두드리며 “妈妈, 别哭了(엄마, 울지 마세요)”라고 나를 위로했다. 서른다섯의 내가 낯선 중국 병원 구석에서 엄마 잃은 아이처럼 서럽게 울게 될 줄이야. 그러다 중국 간호사에게 낯선 언어로 위로받게 될 줄이야. 참으로 예측 불가한 인생이여. 


이후 아이의 염증은 서서히 나아지나 싶더니 2주 뒤에는 다른 쪽 귀로 옮아 데자뷔 같은 생활을 2주간 더 해야만 했다. 종합해 보자면 우리는 이하선염으로 무려 한 달 동안 병원을 들락거렸고 병원비와 약 값으로만 128만 원을 썼다. 아니 돈이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별것 아니었던 염증으로 인해 받은 정신적 고통과 피폐함은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다. 다른 엄마들이 왜 과감하게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지 절감했다.


두 번째 위기는 독감으로 찾아왔다. 학교에서는 각 나라의 문화를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인터내셔널 데이’가 한창이었다. 우리도 외국 친구들이 한국 문화를 즐겁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한복 입고 폴라로이드 찍기, 각자의 이름을 한글로 적기, 한국 간식을 넣은 선물 주머니를 준비하기로 했다. 주말 내내 아이와 즐겁게 100개의 간식 주머니를 만들고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갑자기 독감 진단을 받았다. 햇살 쏟아지는 5월에 독감이라니, 하필 야심 차게 준비했던 인터내셔널 데이에 학교를 못 간다니 지지리 운도 없지. 아이는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엉엉 울었다. 둘째가라면 서럽게 흥이 많은 우리 모녀였지만 그날은 도무지 기운이 나지 않아 오후까지 축 처져 있는데 ‘띵동’ 현관 벨이 울렸다. 문을 열어보니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가 큰 봉투를 들고 있었다. 봉투에는 반 친구들과 선생님의 편지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깜짝 선물을 받은 아이의 기분은 슬픔에서 기쁨으로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다. 신나게 편지를 읽는데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콕 박혔다. 


-얼른 나아서 가치 놀자 


아니, 어떻게 한글을 썼지? 알고 보니 같은 반에 한 명 있었던 한국 친구가 대표로 칠판에 쓰고 다른 외국 친구들이 모두 따라 썼다고 한다. 철자도 틀리고 삐뚤 빼뚤했지만 단언컨대 내가 본 가장 귀여운 글자였다. 어쩌면 평생 처음 봤을 낯선 한글을 고심해서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을 아이들을 떠올리고 또 왈칵 울어버렸다. 


타국에서 살다 보면 병원에 관한 웃픈 에피소드들은 하나씩 생기기 마련인가 보다. 친한 언니가 베이징에 위치한 산부인과에서 둘째를 낳았다. 정기 검진 때 의사가 언니의 배를 수박 무게 재듯 손으로 들어보고, 줄자로 재보더니 ‘아이가 현재 2.8kg 정도’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의 배에 손을 살짝 대보고 ‘**kg 이시네요’라고 말하며 웃기도 했다. 다른 언니는 베이징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무서운 강풍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나뭇가지에 맞아 응급실로 직행해야 했다.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으니 비용도 엄청나다. 한국인들이 자주 가는 국제 병원은 하루 입원 비용만 150만 원, 맹장염 같은 간단한 수술도 2천만 원이 넘게 든다. 원하면 언제든지 두 시간 비행으로 한국에서 편하게 진료를 볼 수 있었던 ‘비포 코로나’ 시대가 아득하다. 


아이 여름 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해서 소아과에 갔다. 친절한 의사 선생님이 내 조국의 언어로 조목 조목 명료하게 설명해 주시는데 어찌나 믿음이 가는지 이런 병원이라면 매일 오고 싶을 지경이었다. 접종까지 맞고 나오면서 진료비를 계산하는데 영수증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5,820원. 순간 ‘0’이 하나 혹은 두 개정도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얼마 전에 바로 옆 동네에서 128만 원을 썼는데… 말입니다. 믿기지도 않고 감격스러워서 그 영수증을 아주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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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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