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루이 Dec 01. 2021

뜨거운 물 많이 마셔

热水는 만병통치약

중국인들은 찬 음식을 일절 먹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차가운 음식을 먹으면 마치 내장이 서리를 맞은 듯, 냉해를 입는 듯 호들갑을 떤다. 그래서 이들은 제주인들이 ‘노지의 한라산’ 소주를 찾듯 상온의 맥주를 마시고, 훠궈를 먹으면서도 따뜻한 차를 마신다. 


허윤선, <훠궈: 내가 사랑한 빨강>, 124p


중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실을 꼽으라면 역시 ‘뜨거운 물(热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내리는 공항에서부터 거대한 온수통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었는데 ‘뭣에 쓰는 물건인고’ 했더니 말 그대로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뜨거운 물을 각자의 보온병에 담아 마시는 용도였다. 학교에도 층마다 큰 온수통이 있었다. 좋아하는 찻잎이 담긴 보온병이나 물병에 물을 가득 채우고 수업에 들어오는 건 모든 선생님의 같은 루틴이었다. 보온병도 어찌나 큰지 저걸 언제 다 마시냐 싶지만 수업 시간이 끝날 땐 비워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빨간 신호등 앞에서 택시 기사 아저씨가 갑자기 내리길래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알고 보니 트렁크에 있는 온수 통에서 물을 리필하고 오신 거였다. 중국인들은 차를 많이 마신다고 듣기만 하다가 실제로 마주하니 엄청났다. 그야말로 ‘차(茶) 마시는 민족’이었다. 


아주 더운 여름날에도 대부분의 식당에서는 뜨거운 물을 줬고 차가운 물은 비용을 따로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맥주도 미지근하게 줬다. 차가운 맥주를 달라고 하자, 차가운 맥주는 몸에 좋지 않아서 우리 식당에는 차가운 맥주가 없다고 했다. (맥주를 건강해지려고 마시는 사람도 있냐… 미지근한 맥주는 몸에 좋냐…) 더럽게 맛없는 맥주를 마시면서 ‘와, 이 사람들 뜨거운 액체에 진심이구나’하고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게 됐다. 


학교 수업 시간에 담임 선생님의 한국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뿌듯한 마음에 서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진짜 잊지 못할 일이 있었다면서, 한 겨울이었는데 식당에서 차가운 물을 줘서 깜짝 놀라 기절할 뻔했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고 생각해 보니 한국인들은 차가운 음료에 거리낌이 없다. 백승주 작가가 <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에서 말했듯 중국 식당과 한국 식당은 ‘물’에 대한 디폴트 값이 확연히 다르다. 한국의 식당의 기본은 냉수고, 중국 식당의 기본은 뜨거운 차다. 


따뜻한 차를 마시는 이유는 중국의 물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국인들은 뜨거운 물을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잔병이나 몸의 '不舒服(불편함)'을 풀어주는 것이 뜨거운 물의 효능이라고 생각한다. 감기에 걸렸을 때도, 소화가 잘 안될 때도, 두통이 있을 때도, 심지어 관절이 아플 때도, 남편들이 주야장천 “뜨거운 물 많이 마셔(多喝点水)”라고만 이야기한다며 뜨거운 물로 다 해결되면 남편이랑 의사는 무슨 소용이냐며 화를 내는 중국 여자들도 있다고 해도 깔깔 웃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다. 베이징에서 뜨거운 물 마시기를 습관화했더니 몸이 좀 편해졌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보이차 잎이나 백차 잎을 넣고 우린 차를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속이 편안하다. 종종 느꼈던 위통도 사라진 느낌이다. 이후 아주 무더운 날의 맥주가 아니라면 과하게 차가운 음료는 멀리하게 됐다.  


중국인들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상당하다. 특히 양말에 민감한데, 봄이나 가을에 아이 양말을 신기지 않으면 몇몇 어르신이 꼭 말을 거신다. “아이 양말을 꼭 신겨야 해요. 발이 차면 온몸이 차가워져.” 아이스크림을 좋아해서 겨울에도 가끔 먹는 편인데 구입할 때는 꼭 배달로 시키거나 까만 봉지를 애용한다. 추운 겨울에 아이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사는 ‘철없는 엄마’를 어르신들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 


몇몇 중국 엄마들은 아이들의 식단에도 상당히 예민한 편인데 요리를 할 때 찬 성질과 뜨거운 성질을 가진 재료를 적절히 배합해서 요리한다고 해서 ‘빨리 요리하고 치우기’가 지상 목표인 나를 놀라게 했다. 중국에서 키우는 저렴한 닭들이 성장 호르몬을 맞고 자란다는 뉴스가 보도되자 다들 학교 급식 재료에서 닭을 제외해야 한다고 했다. 아이의 건강을 걱정하는 성토의 장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성장 호르몬을 맞은 닭을 많이 먹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 곰곰이 생각했다. 혹시 키가 크는 것이 아닐까? 작년 건강검진에서 거짓말처럼 키가 1센티미터 자랐었는데 혹시 중국에서 먹은 닭 요리 때문은 아닐까?


어쨌거나, 칼바람이 무서운 북경의 겨울이 다가왔다. 스산한 감기 기운이 몰려오는 것 같아서 어깨를 움츠리며 빠르게 걷던 하굣길. 오며 가며 만날 때마다 유쾌하게 말을 걸어주는 경비 아저씨에게 식사하셨냐고 물어보며 감기에 걸린 것 같다고 하자, 


나만의 비밀을 너에게만 알려준다는 표정으로 사뭇 진지하게 하시는 말씀.  


-多喝点热水(뜨거운 물 많이 마셔)


어느 순간 나도 차를 즐겨 마시게 되었다.
우연히 듣게 된 차 수업도 재미있었다. 넓고 깊은 차의 세계~

----

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