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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Aug 10. 2017

결혼

결혼은 예전에 장점으로 다가왔던 상대방의 모든 성향과 환경들이 ‘단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가령 철없는 막내딸의 밝고, 까다롭지 않은 낙천적인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면, 그것은 어쩌면 결혼 후에도 여자가 집안일에 도통 관심이 없거나, 관련 지식의 현저한 부재로 미친 듯이 바빴던 어느 날 퇴근 후 회사 근처 마트에서 찢어져도 도무지 바뀌지 않는 수세미나 화장실 세제를 직접 사야 하는 삶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날씨와 장소에 따라 매일 다른 느낌으로 맞춰 입는 코디 센스에 설렜다면 그것은 어쩌면 너무나 방대한 옷의 양으로 신혼집 옷장의 1/10 정도만 내 몫이라는, 급기야 내 양말은 침대 아래 구석 언저리에서 찾아 신어야 한다는 것의 다른 의미일 수도 있다. 낙천적인 성격은 ‘힘내서 열심히 하자. 우리는 할 수 있어!’라는 파이팅 넘치는 메시지를 늘 전해주지만, 종종 곰팡이가 핀 채 냉장고에서 자고 있는 음식들을 발견하게 한다. 매력적이었던 화목하고 따뜻한 집안 분위기는 호기심 많은 장인어른의 끝이 없는 질문 리스트와 겹쳐진다. 

 

뭐 그 반대의 사례도 많다. 안정적이고 빈틈없는 남편의 성격이 나의 엉성한 면을 채워줄 수 있겠다고 확신했겠지만, 가끔 아파트 주차장에서 시동을 켠 후(혹은 엘리베이터 혹은 신발장에서), 가스 불을 진짜 제대로 끈 게 맞는지 집에 다시 확인하러 올라가거나

, 아이의 사소한 행동과 질병에 나보다 더 민감한 남편을 만날 수 있다. 모든 일을 혼자 해내려는 그의 마음가짐은 때로 나를 불편하게 하지만 나는 그런 책임감을 높이 샀었다. 때때로 나보다 더 치밀한 남편의 저장 욕구로 인해(한 번 마음먹은 일에는 도무지 빈틈이 없다) 전 세계 호텔의 어메니티나(실은 샤워캡까지) 모든 비행기의 기내용 담요 성능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혼자 장보기를 즐기는 남편의 장바구니에서 깨끗한 육수를 만들어주는 ‘육수 팩’을 보게 되면, 멸치와 다시마를 때려 넣고 대강 팔팔 끓이는 나의 요리 습관을 다시 한 번 점검하게 된다. 

 

닮았다고 확신한 사람과 같이 살았어도 비슷했을 거라 생각이 들지만, 가끔은 신기할 만큼 참으로 다른 사람 둘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스무 살 즈음의 나는 나와 감성이 비슷한 사람-비슷한 음악을 듣고, 비슷한 책, 비슷한 영화를 보는-을 좋아했었는데, 결혼은 정반대의 사람과 했다. 몇 번의 연애 경험으로 ‘다름’의 소중함과 장점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결혼, 삶, 생활에는 더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모두의 기준은 제각각이겠지만) 적어도 나는 넘치는 감성으로 늘 불안정하고, 뭘 해도 빠르지만 대강인 나의 부족한 면을 채워줄 사람과 더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내가 한 선택의 결과에 참으로 만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우리 집 책꽂이를 말없이 바라본다. 남편과 나는 책꽂이를 대강 왼쪽, 오른쪽으로 절반씩 나눠 쓰고 있는데 그 리스트 사이는 남과 북의 관계처럼 가깝지만 멀고, 도무지 ‘교감’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가 없다. 남편과 나는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책을 돌려 본적도 거의 없고, 서로가 읽는 책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우리는 어떻게 잘 살고 있을까.  

 

그 이유는 역시 감성과 이성, 순발력과 지구력, '대강 빠름'과 '꼼꼼하게 느림'처럼 서로가 다르게 가지고 있는 자질이 모든 사건에 적당히 버무려지며 나오는 균형감(살아가는데 그런 게 필요하다면), ‘다름’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덤덤함,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의 성향에 대한 ‘존중’ 때문일 것이다. 시나 소설은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시집을 사서 선물해주거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먼저 알려주는 그 마음, 내가 보고 싶은 독립영화를 굳이 함께 보겠다고 고집을 피워놓고 10분 만에 옆에서 드르렁 코를 고는, 그러고도 한사코 방에 들어가지 않고 소파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나의 영화 감상을 끝끝내 방해하는 노력의 가상함(?), 성향은 참 다르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가치는 비슷하다는 순간순간의 깨달음 덕분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 아니 절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이 사랑에 빠지는 연인들에게 필히 해야 한다던 “당신은 어떤 미친 구석이 있습니까?”라는 질문도 딱히 필요 없이 나의 미친 구석을 이해해주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남편을 만나서 나는 미친 여자에서 조금 덜 미친 여자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누구나 어떤 부분에 (이상하게) 미쳐서 살아간다. 그 광기는 연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잘 들키지 않는다.) 실제로 요즘 어떤 상황에서도 욱하지 않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면 넓고 넓은 아량과 사랑은 절대 변할 수 없다는 성격도 변화시키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어쨌거나, 부부가 서로의 행동들과 성향들을 모두 이해하면서 살아갈 필요도, 그럴 수도 없다. 그저 존재의 든든함을 느끼며, 사랑을 받는 것보다 나눠주는 것에 조금 더 익숙해지며 함께 늙어가면 그뿐이다. 

 

결혼 후 나를 의아스럽게 하는 그 면면들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선택했던 이유의 반대급부라는 것을, ‘다름’은 ‘다름’일 뿐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늘 명심하자는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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