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다시 돌아갈 준비.
누군가 내게 파리에서 무엇을 하였나 묻는다면 나는 그저 존재하는 일을 했다 하겠다. 공간 속에 서거나 앉거나 누워, 세계를 전부 감각했으므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몸을 마침내 연마했노라고. 그럼에도 거기 남아 있는 얼굴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고.
목정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18p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을 좋아하던 내가 진짜 이방인이 되었다. 이방인이 되면 마냥 쓸쓸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매일 이불킥 할 에피소드를 주웠지만 좋았다. 가끔 아무런 존재감도 없이 어떤 풍경처럼 남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이방인 생활은 나를 자주 그렇게 만들어줬다. 아무 말도 안 들리고, 아무도 나를 알아볼 사람이 없을 것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나는 한 점의 먼지처럼만 존재했다. 그럴 때면 머릿속에 넘쳐 나는 고민들도 모두 접어두고 오로지 나라는 인간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보다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 더 방점을 찍어 온 인생이었던 터라 그런 시간이 귀했다. 물론 귀한 시간은 영원하지 않고, 나는 5번의 겨울을 보내고 귀국을 준비하고 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들을 찬찬히 끄집어내 본다. 과로사할 백수가 되어 베이징 곳곳과 몇 백 개의 후통을 걷고, 열심히 기록했다. 소유와 경험 사이에서 갈팡질팡 대던 저울의 추는 경험으로 확실히 기울어졌다. 중국 각지의 음식들을 찾아서 먹고, 읽을 수 없는 책들이 반기는 서점을 뻔질나게 돌아다녔다. 무엇보다 아이의 다섯 살부터 열 살까지의 하루하루를 온전히 함께 했다. 매일 우리는 참 많이 웃었다. 중국어라는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마음을 열 듯 열 듯 절대 열지 않던 그 친구 때문에 속앓이도 많이 했었지만 나는 끝까지 그 친구를 따라다닐 생각이다.
베이징에 오기 전 ‘프렌즈 베이징’이라는 여행 책을 샀다. 살러 가면서 무슨 여행 책이야! 싶었지만 여행자처럼 가볍고 단순하게 살고 싶어서, 반대로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니 온 영혼을 깨우고 절실하게 걷고 싶어서, 그랬다. 책을 자주 펼쳐 보지는 않았지만 오며 가며 책등을 볼 때마다 생활 여행자가 되어 살고 싶던 마음을 생각했다.
살랑살랑 불어오던 봄바람을 맞으며 후통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라오베이징런(老北京人)’들이 후통의 작은 식료품 가게에서 야채와 과일, 고기 등을 사서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오랜 역사가 깃들어 보이는 정육점의 사장님은 열심히 고기를 썰고 계셨다.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정육점의 붉은 조명과 사장님의 둔탁한 칼질 소리, 비릿한 건지, 상쾌한 건지 알 수 없는 아침의 후통 냄새가 나의 오감을 자극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다시 예전처럼 살지는 못할 것 같아. 그것은 의지나 결심이 아니라 어떤 예감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날아오르는 야구공을 보고 문득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던가. 그처럼 위대한 순간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나도 그랬다. 고기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나를 둘러싸고 있던 하나의 장막이 걷히는 느낌이었다. 그제서야 진짜 여행자이자 이방인으로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디딘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아주 오래 찾아 헤맨 마음을 꽉 쥔 것만 같았는데 그 마음은 ‘배짱’과 비슷한 결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 좋아할 수 있도록 진심을 다해 나를 믿어보고 싶었다. ‘기회 비슷한 것’ 말고 진짜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정육점 메뉴판에서는 가당치도 않을, 하고 싶은 일을 우직하게 하는 스스로를 견뎌 볼 용기와 아무런 결과가 없더라도 자책하지 않을 너그러움을 주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말에 다다른 셈이다.
-인생의 목적은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 시간을 나답게 경험하는 것. 그리하여 자기 자신이 되는 것.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세계’가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세계’에서 계속 살아 가는 것. 이방인 생활의 가장 큰 발견은 무언가를 읽고 쓸 때 제일 행복한 스스로였으니 시간의 무게를 글과 함께 견디고 싶다. 특출난 재능이 있어서, 읽어줄 독자가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고, 쓰지 않으면 안 되니까 쓰는 것이 글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매일 조금씩 걷고 조금씩 쓰기. 이 쉽고도 어려운 일을 꿈꾸고 있다. 좋은 문장과 함께라면 도무지 불행해질 자신이 없으니 매일 읽고 쓸 수 있다면 나는 오래 행복할 것이다.
한국에서 살 집을 구하려고 부동산 사이트를 열어보니 5년간 천지개벽이 있었던 모양이다. 예전에는 매입할 수도 있었던 집이 전세로도 어려워졌다. 크게 좌절하지는 않았다.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즐겼으니 대가가 없다면 오히려 불안한 일이다. 어른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정작 걱정하는 것은 아이였다. 생일 초를 불며 아이는 좋은 집을 구하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다고 해서 우리를 웃겼다. 작지만 마음에 쏙 드는 집을 구했다.
한국 생활에서 제일 기대되는 것은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 다시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 그리고 역시 도서관과 서점에 가는 것이다. 예전에는 읽을 수 있는 책들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잘 몰랐다. 이제 아무 책이나 꺼내 들고 읽어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니, 그 시간이 오히려 낯설 것 같다. 그 행운들을 마음껏 누리겠다.
우리 집 변기에 머리를 박았던 집주인은 우리의 귀국 소식에 분주해졌다. 바로 이모님(阿姨)을 우리 집으로 보내 화장실과 주방 청소를 시키더니, 다음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벽지 기사님이 모든 벽의 치수를 재며 상태를 점검하고 계셨다. 하긴 5년을 살았으니 대대적인 공사가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이 집을 떠나고 벽지와 입주 청소까지 하고 나면 우리의 흔적은 지워지겠지. 아이는 이 집에 들어올 새로운 사람에게 쪽지를 남기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베이징 생활과 추억이 모두 담긴 이 집을 잘 부탁한다고.
베이징에 오니 한국 지인들의 삶은 더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동료들과 친구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경력과 재산을 착착 불려 나갔다. 나는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면서 멕시코에서 날아온 22살 청년과 중국어 수업을 들었다. 새로 학생이 되는 일은 설레는 일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해도 중국어는 좀처럼 늘지 않았고, 무엇보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낯선 외국어로 어떤 생산적인 결과물을 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내 벽에 부딪혔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지금의 여유를 누려도 될 텐데 태생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는 스스로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몇몇은 진심으로 나를 부러워했다. 서로의 삶이 스쳐 지나가던 찰나에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서로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가끔 엉망처럼 느껴지는 내 삶을 누군가는 부러워하는구나. 그런 나도 누군가의 삶을 부러워했구나. 갑자기 깨달음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생각이 나를 덮쳤다. 그렇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삶은 없으므로 모두가 누군가의 삶을 부러워한다. 일방적으로 부러움만 받는 삶도, 그 반대의 삶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 아무도 서로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를 부러워할 에너지를 모아서 내가 선택한 삶을 받아들이고 더 잘 살아가는데 집중하면 그만이다. 장기하는 그런 깨달음을 유쾌하게 적어 신곡을 발표했다. <부럽지가 않어>.
-부러움이란 거를 모르는 놈도 있거든, 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너한테 십만 원이 있고 나한테 백만 원이 있어. 근데 세상에는 천만 원을 가진 놈도 있지. 누가 더 짜증 날까.
대략 이런 내용이다. 역시 장기하. 어차피 더 큰 걸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게 되니 애초에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별일 없이 산다>, <그건 니 생각이고>에 이어진 쓰리콤보 느낌.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이라 이 노래를 종종 흥얼거릴 것 같다.
불안한 이방인으로 매일 벽에 부딪히며 나는 조금씩 부서지고, 다시 조금씩 단단해졌다. 이제는 안다. 무의미한 시간은 없으며 이 시간들이 분명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줄 것을. 이곳에서 그랬듯, 어쩌면 돌아가서도 나는 이방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5년의 시간이 남긴 것들을 기억하며 그 어딘가에서 나는 또 지겹게 내가 되어 끝없이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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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스토리
https://brunch.co.kr/brunchbook/thebeijinge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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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