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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Jan 14. 2022

열정 과다 원심 투어를 소개합니다.

함께라 추억이 된 시간들

클래식 영화 속 런던의 건물들이 그대로여서, 우리의 시대가 지나고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도 그대로겠구나, 우리가 건물들을 방문하는 게 아니고 건물들이 잠깐 지나가는 우리를 보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었다. 언제나 거기 있을 것과 잠깐 거기 있는 것을 사이를 누빌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다. 사람들이 다시 여행할 수 있는 시기가 오면, 행운들이 고르고 넓게 주어졌으면 좋겠다.    


정세랑,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하루아침에 낯선 도시로 불쑥 떠난 나를 보러 친한 친구들도 자주 베이징에 들렸다. 우리 커플이 준비한 ‘원심 투어’는 하루 최소 1만 5 천보, 12시간, 맛있는 중식 2끼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혹독한 해병대 전투와도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가 이렇게 좋은 곳이라고 안심시켜 주고 싶어서, 맛있는 중국 음식이 이렇게 많으니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마음에 무리를 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도시가 겹쳐지니 열정이 너무 커진 탓이랄까. 


사실 그때는 베이징 생활 1, 2년 차라 별로 아는 것도 없었다. 단체 여행객처럼 이화원, 만리장성, 경산 공원 같은 곳을 데리고 갔다. 베이징 맛집을 네이버 블로그에서 찾아야 하는 아이러니한 시절이었으니 ‘진짜 맛집’을 찾을 수 있는 역량도 없었다. 그때 이후 본격적으로 산책을 시작하며 베이징에 대한 이해도가 열 배, 백 배는 깊어진 느낌이라 지금 다시 함께 이곳을 여행할 수만 있다면 더 여유롭게, 훨씬 더 좋은 코스로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라는 복병을 만나서 더 이상 한국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베이징을 자유롭게 걸을 수 없다는 점이 너무 아쉽다. 베이징을 행복하게 걸으면서 조금 슬픈 것은 그 때문이다. 


다시 친구들과 걸을 수 있다면 유명한 관광지는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 끝내주게 맛있는 조식 만찬을 즐기고 내가 사랑하는 후통을 화장실 냄새를 맡으며 함께 걷고 싶다. 도저히 무언가가 찾아질 것 같지 않은 골목 끝 카페에서 끝내주게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마시고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짭짤한 베이징식 자장면을 먹겠다. 평일 점심에도 20-30명이 줄을 서 있는, 미슐랭 스티커가 영롱하게 붙어 있는 그 식당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는데 쉽게 깨지는 음료수 병은 절대 식당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는 것이다. 반쯤 남은 땅콩음료 ‘화성루(花生露)’를 들고 나가려는 나에게 사장님이 소리 치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라 한 번에 알아듣지를 못하고 멍하게 있었더니 사장님은 다시 소리쳤다. 작고 허름한 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 갑자기 소극장 연극의 주인공, 그러니까 어리바리해 보이지만 어두운 후통을 거닐다 유리 조각으로 어떤 범죄를 저지를 테러범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啊! 明白!” 


첫 연기를 선보이는 신입 단원처럼 깨달음의 리액션은 예상보다 더 크게 튀어나왔고, 그것은 나를 향한 주목도를 더 끌어올렸다. 그것이 이 후통의 규칙인지, 25위안짜리 자장면을 팔아서 베이징에 이미 몇 채의 건물을 샀을 것만 같은 이 식당의 규칙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왕 주인공이 된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며 남은 화성루를 원샷하고 유리병을 살포시 내려놨다. 어쨌거나 그녀에게 한국식 자장면보다는 짜지만 나름의 매력이 있는 베이징 자장면을 먹이고 맛있냐고 백 번 물을 것이다.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근데 여기서 절대 유리병을 가지고 나가면 안 돼’라고 비밀 요원처럼 속삭이겠다. 


중국에 입국하기 위해서 필히 요구되는 것이 바로 비자다. 이 귀찮고, 비싸기까지 한 프로세스를 거쳐서 별 매력도 없(어 보이)는 이 도시에 나를 만나러 왔던 친구들을 떠올린다. 공항 입국장에서 아이와 어설프게 만든 플래카드를 들고 문이 열릴 때마다 동공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던 나를 떠올린다. 내가 좋아하는 떡볶이 양념 스무 봉지와 한라산 소주, 로션을 캐리어에 잔뜩 넣어온 그녀들을 떠올린다. 무엇보다 친구가 사는 도시이기에 더없이 긍정적이었던 그녀들의 따뜻한 마음을 기억한다.  


최근에 정세랑 작가의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재미있게 읽었다.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작가는 조금 무리를 해서 소중한 친구가 있는 도시로 떠난다. 그녀의 글은 다양한 나라의 유명한 곳들을 소개하는 여행기라기보다는 멀리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서 맞닥뜨린 에피소드와 그 시간들을 통과한 내밀한 고백이다. 읽다 보니 작가의 여행 면모가 내 친구들의 그것과 매우 닮아 있었다. 우선 떠나기 전에 그들은 나의 일상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했고, (심지어 따로 숙소를 잡겠다고 한 친구도 있었다.) 어떤 날은 주인 없는 집에서 수업을 듣고 오는 나를 기다렸다. 눈썹을 휘날리며 집으로 달려온 내가 발견한 건 내가 팽개쳐 둔 설거지를 깔끔하게 하고 쉬고 있던 친구였다. 그녀는 씩 웃으며 화장실 청소 팁도 알려 주었다. 친구 1이 살아가는 낯선 도시에 친구 2가 놀러 온 여정은 핫플레이스에 가서 예쁜 사진을 찍었던 대학생 때의 만남이나 새로운 도시로 함께 여행을 갔던 시간과도 확연히 달랐다. 일상과 여행의 중간에서 내내 서성였고, 공항에서의 벅찬 만남과 슬픈 이별이 있었다. 


김연수 작가가 그랬었지. 혼자 하면 기억이고 같이 하면 추억이 된다고. 어쩌면 아주 오래 꺼내 볼 추억들을 쌓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면 그녀들로 인해 나는 베이징 생활 전반기에 좋은 추억들을 꽤 많이 쌓을 수 있었다. ‘이제 이곳을 누려봐야겠다’라고 결심한 순간 전 세계적 재난이 지구를 강타하여 여행의 자유는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분기별로 찾아오던 나의 친구들도 2년째 발 길을 끊었고, '내년 여름에 들릴게'라던 다른 친구들의 계획도 모두 틀어져 버렸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나에게 제2의 고향이 되어 버린 이곳을 대강이라도 소개할 수 있어서. 


내 마음을 닮은 문장을 만나면 몇 번이고 읽는다. 너무 많이 읽어 이미 좀 닳아버린 듯한 정세랑 작가의 이 문장들로 내 마음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만나고 싶은 마음,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잘 다스리면서 길고 어두운 시기를 지낼 각오를 한다. 쑥스럽지만 어떤 날, 우리가 함께 보냈던 짧은 낮과 길게 붙잡았던 밤이 나를 구했다고 친구에게 꼭 이야기하고 싶다.’ 


찰나와도 같았던 그 낮과 밤들이 나를 구했다. 정말 그랬다. 



그리고 이어지는 스토리. 

https://brunch.co.kr/brunchbook/thebeijinger2


새 이불과 술을 쌓아두고 너를 기다려~
方砖厂 69号 炸酱面
아름다운 미슐랭 스티커와 문제의 화셩루, 앉자 마자 1초만에 나오던 자장면은 역시 맛있었다.




두근거리던 만남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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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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