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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Jun 22. 2022

꽤 너그럽게, 진짜 여름

여름에 닿은 문장들, 송리단길에서


일 년에 꼭 하루 그런 날이 있다.

이제 꼼짝없이 여름이다, 이제 꼼짝없이 겨울이다.

느끼게 되는 날이.


숨 막히게 더웠던 어제가 내겐 그런 날이었다.


여름 하면 맥주. 특히 테라스에서 혹은 걸어 다니며 마시는 맥주를 좋아한다. 십여 년 전 한 여름낮, 도쿄에서 먹은 생맥주와 야키도리를 잊지 못한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경이로운 맛에 동전까지 탈탈 털어 생맥주를 들이켜고 기차를 탔는데 왕복이라고 생각했던 기차표가 왕복이 아니었다. 그때 우리는 ‘미스테이코, 스미마셍’만 무한 반복하는 아주 웃긴 이방이었지.


그뿐이 아니다. 목에는 카메라를 걸고, 손에는 캔 맥주를 들고, 도쿄의 모든 문들과 골목을 찍겠다는 일념으로 걸어 다니던 한 여름의 오후도 있었다. 그때 내가 느낀 행복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 행복을 함께 한 사람과 조금씩 늙어간다. 삶의 행운이란 이런 것이다. 


여름을 온몸으로 느끼며 내 마음에 닿아 있는 여름에 관한 문장들을 떠올려본다. 어느 날부터 어떤 시간과 장소를 맞닥뜨리면 자연스럽게 문장들이 떠오르는데, 그 단어와 이미지를 품고 있자면 굉장히 부자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삶의 행운이란 이런 것이다. 




비는 한 시간 남짓해서 그쳤다. 유리창을 열자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비에 씻긴 초록에서 솟구치는 냄새.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8월의 끝자락에 들어서고부터는 조금씩 식은 바람이 불어온다. 뭐랄까, 인생을 낙관하게 만드는 바람이다. ‘이거면 됐어’ 생각하게 만드는 바람. 주말 오후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 창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이다. 테라스에 캠핑 의자를 내놓고 앉아 있을 때 부는 저녁 바람 그리고 아침저녁 출퇴근길에 시원하게 뺨을 스치는 늦여름의 바람. 이럴 땐 좋은 기분을 느끼는 것 외에 더 바랄 게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김신지, <평일도 인생이니까>




여름날의 햇빛이 거리를 두 부분으로 나눴다. 그늘진 곳은 물처럼 시원하여 나는 사람들을 따라 이리저리 물고기처럼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을 바꿔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쪽으로 가서 고독하고 오만하게 자신의 그림자를 밟고 섰다. 머리가 온통 땀에 젖고 이어서 몸 전체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목적지에 이르면 나는 막대 얼음과자를 사서 내 사진을 위로했다.


-베이다오, <베이징, 내 유년의 빛>





여름은 적당한 것을 넘기지 못하고 기어코 끓게 만든다. 나는 여름이 정말이지 너무 좋았다.


-서한나, <피리 부는 여자들>





여전히 나는 구멍 난 여름휴가의 추억을 메꾸면서 산다. 그래서 여름이라는 계절을 이토록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의 수고를 알아주는 시기, 고단함을 위로하는 시기. 여름은 내게 한없이 너그러워지기 좋은 계절이니까.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자주 떠나고 싶다. 가급적 여름에, 여름인 곳으로. 뜨거운 여름 안에서 실컷 널브러지고 맘껏 누리고 싶다.


-김신회 , <아무튼,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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