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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Aug 18. 2022

5. 하이난에서 생긴 일

무라카미 하루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분명 미리 ‘영어로 말해야지’하고 준비했기 때문에, 그래서 머릿속에 그 생각이 가득하여 상대가 어느 나라말을 하는지까지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146p


아이 학교 4월 방학을 맞아 세 가족이 함께 하이난에 갔을 때의 일이다.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중국 드라마 <친애적, 열애적>의 촬영지이기도 한 하이난 최고의 호텔 '아틀란티스'에 투숙했다. 베이징에 남아서 호텔 예약을 담당해 준 춘이 아이들의 졸업 우정 여행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해 준 덕분에 운좋게 스위트룸 업그레이드까지 받았다. 친절한 중국인 남자 직원은 우리의 짐을 방까지 옮겨줬다. 그리고 '우리 호텔에 온 것을 환영한다'라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당부 사항을 영어로 말했다. 덩치가 큰 그 직원의 영어는 능숙하지 않았다. 그는 바이두 번역기를 열고 중국어로 문장을 말한 다음 번역된 영어 문장을 더듬더듬 읽었다. 모든 문장에 이 과정이 반복됐다. 사실 간단한 중국어였기에 나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고 시간을 줄이고 싶은 욕심에 나는 그에게 계속 중국어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중국어를 한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땀을 흘리며 번역기를 돌렸다. 미리 '영어로 말해야 한다'라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기 때문인지 내 중국어가 귀로 들어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너무 쩔쩔매면서 영어를 하던 터라 나도 안절부절못했다. '이봐요, 제가 지금 중국어를 한다고요'라고 어깨를 치며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의 집중력은 내가 함부로 깰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라는 마지막 말을 영어로 전달하고 나서야 땀이 송골송골 맺힌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낯선 이와 외국어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안쓰러웠다.


그 직원의 뒷모습을 보며 예전에 하루키 에세이에서 읽었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하루키가 호놀룰루의 스타벅스에서 일본인 신혼부부와 마주친다. 카운터에서 금발의 미국인에게 영어로 주문하는 일본인 여성. 더듬거리며 "아이스 캐러멜마키아토 톨 한 개 하고..."라고 영어로 말하자 금발의 미국인이 유창한 일본어로 대답한다. 하지만 그 일본인 여성은 금발의 미국인이 일본어를 한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계속 힘겨운 영어를 이어간다. 그리하여 일본인 여성은 계속 영어로, 금발의 미국인은 계속 일본어로 대화를 이어가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진다. 일본인 여성의 머릿속에는 금발 여성이 일본어를 할 거라는 계산은 없었던 모양이라고 그는 적었다. 하이난 그 청년도 그런 것 같았다. 그는 준비한 영어를 계속해야만 했고, 그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언어라는 게 그렇다. 이렇게 말해야지, 너무 여러 번 생각해 버리면 주변의 변수들을 재빠르게 캐치하지 못하게 된다. 열심히 외운 문장들을 로봇처럼 내뱉는다. 나도 베이징에서 '대화'라기보다는 '대사'라는 단어가 적합할 것 같은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버벅대다가 외운 문장이 잘못 나가기라도 하면 'NG'라고 소리치며 첫 문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이난 여행을 떠올리면 아틀란티스의 환상적인 스위트룸이나 워터 랜드보다 땀을 뻘뻘 흘리며 내게 영어로 계속 이야기하던 그 직원이 생각난다. 여행의 인상적인 순간들은 늘 그렇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만들어져 오래 마음에 남는 경우가 많다.


그 직원은 아직 그곳에 있을까? 오늘도 외국인 손님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을까? 계속 성실하게 열일하고 계실 것이라 짐작됩니다만... 낯선 외국인이 당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참 좋았던 하이난 아틀란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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