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적셔주는 맥주

by 심루이

은재를 재우고 맥주와 쥐포 콜라보가 간절해 신나게 쥐포를 구웠는데 맥주가 없다. 냉장고를 한 칸 한 칸 꼼꼼하게 뒤져도 나오지 않는 맥주. 우리 집에 맥주가 떨어지다니 이런 일이! 정말 좌절스럽다.


아파트 단지 내 한국 마트인 ‘낙원 식품’에 바로 전화를 건다. 배달 문화가 발달된 북경은 아파트 단지 마트에서 20위앤(3,400원) 이상만 시키면 공짜로 배달해준다. 칭다오 맥주 작은 사이즈 8캔이 정확히 10분 만에 우리 집에 도착했다. 북경의 많은 점이 좋지만 그중에 제일은 맥주가 싸다는 점이다. 칭다오 맥주 작은 캔(330L)이 고작 4위앤. 700원 남짓. 묶음으로 사면 더 저렴해진다. 이런 행복한 나라라니!!!

나는 맥주가 좋다. 정말 좋다. 한때 컨트리 밴드 '바비빌'의 ‘맥주는 술이 아니야’를 인생 노래로 정해 내내 흥얼거리며 맥주를 마실 만큼 맥주의 시원함, 청량함, 적당함, 그 모든 것이 좋다.

1989년에 탐구생활을 푸는 날. 마루로 불러내셔서 아버지께선 맥주를 따라주셨네.

어머닌 깜짝 놀라며 애한테 무슨 짓이냐 했지, 아버진 껄껄 웃으며 상관없다며 이렇게 말씀하셨네.

맥주는 술이 아니야 갈증을 풀어줄 뿐야. 아무리 들이부어도 취하진 않네

맥주는 술이 아니야

언젠가 나이가 들어 내 몸이 술을 안받아주면 난 술을 끊어야겠지 맥주만 빼고

맥주는 술이 아니니까

맥주는 술이 아니야 인생을 적셔줄 뿐야.

아무리 들이부어도 취하진 않네 맥주는 술이 아니야.


아 정말이지 명가사가 아닐 수 없다. 맥주는 술이 아니야, 음료수지! 라는 평소 나의 마음과 정확히 일치.

맥주는 진짜 우리 집의 음료수였다. 고깃집에서 고기보다 술을 먼저 주문하는 아빠는 둘째치고, 나만큼 술을 좋아하는 친 오빠는 집에서 종종 맥주 한 캔을 따고 음료수처럼 마시면서 컴퓨터를 하고, 책을 봤다. 나는 그 모습이 왠지 멋있어서 대학에 들어간 즉시 종종 혼자 맥주를 (별다른 안주 없이) 음료수처럼 마셨다. 그때는 진짜 맥주 1-2캔에는 취하지도 않았다.

남편과 연애를 막 시작했을 신입사원 시절, 힘든 하루를 마무리하며 맥주 한 잔 할까~ 얘기를 꺼낸 나에게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 오늘은 커피 어때?”라고 한 지금의 남편과는 심각하게 헤어짐을 고민해야 했다. 바비빌의 노래처럼 나에게 맥주는 술이 아니라 ‘인생을 적셔주는 그 어떤 것’이었는데 내 연인이 함께 젖어 들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심각한 일은 없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는 나보다 술을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연애 시절, 카페에서 주말 데이트를 할 때면 종종 나는 맥주를, 오빠는 커피를 시켰는데, 종업원은 늘 당연하다는 듯이 물어보지도 않고 오빠 앞에 맥주를, 내 앞에 커피를 내려두곤 했었다. 대체 대낮에 커플이 맥주와 커피를 시키면 맥주는 왜 당연히 남자의 것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편견을 향한 왠지 모를 반항심에 나도 모르게 더 빨리 맥주를 들이켜곤 했었다.

맥주 인생의 가장 큰 위기는 ‘임신’이었다. 숙취 증상과 비슷했던 입덧 시기가 지나고 무더운 여름이 오면서 나는 맥주가 마시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되었다. 신혼집 근처 합정역 골목골목의 야외 테라스에서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젊은이들을 보는 것은 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종종 먹지도 못할 맥주를 시켜 오빠에게 마시라고 강요하며 남편 입가에 남은 거품이라도 먹고 싶다는 변태스러운(?) 상상을 하곤 했다.

임신했을 때 유일하게 남편과 싸운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바로 맥주 때문이었다. 임신 8개월 무렵, 6-7종의 무알콜 맥주를 돌려가며 먹고 있던 시절이었다. 남편은 워크샵을 떠나고, 간담회 준비로 무척이나 힘들었던 어느 퇴근길. 마침 떨어진 무알콜 맥주가 배달 오는 날이라 부푼 배를 안고 힘들게, 하지만 기쁘게 집으로 향했는데 이마트에서 배달 온 장바구니에 무알콜 맥주가 아닌 그냥 맥주가 들어있던 것이었다!!! 무알콜 맥주가 떨어져서 대체 상품으로 다른 '알콜' 맥주를 넣은 이마트 직원의 착오로 생긴 일이었는데 나는 갑자기 너무나 서러워져서 부푼 배를 움켜쥐고 엉엉 울었다. 그 분노의 불꽃은 당연하게도 아무 죄 없이 워크샵을 하고 있던 남편에게…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고, 별것 아닌 일인데 뭐 임신한 여자의 심리란 그런 것이다. (정상인의 생각 회로로는 이해 불가) 아무래도 맥주를 먹지 못한 7-8개월간의 서러움이 그때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 아닐까 한다. (무알콜 맥주를 전부 마셔봤는데 제일은 독일산 크라우스탈러였다. 물론 2% 부족하다)

모유 수유가 끝나던 날 들이키던 맥주가 생생하다. 시원한 한 잔의 맥주는 내게 인생의 행복이란 아주 사소하다는 진리를 늘 깨우쳐준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이 글도 맥주에 쥐포를 먹으면서 쓰고 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술이 아닌 음료수인’ 맥주만 많이 마셔도 다음 날 숙취에 시달리고, 한 캔만 마셔도 헤롱거릴때도 있지만, 맥주는 언제나 나의 친구.

맥주는 술이 아니니까. 인생을 적셔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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