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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Nov 29. 2022

문장을 닮아가는 삶

매일 열 개의 문장들

베이징 생활 5년 동안 가장 공포스러웠던 순간을 꼽으라면 그 아침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맥도날드에서 떠우장을 한껏 머금은 부드러운 요우티아오를 맛있게 먹고 잠시 손을 닦고 왔는데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노트북과 가방!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손이 벌벌 떨렸다. 짧은 3초의 순간 맥도날드 사무실에서 CCTV를 보고 경찰서에 가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말해야 하는 중국어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울상을 하고 데스크 쪽으로 가서 '빠오(包_가방)'라고 한 단어만 말했을 뿐인데 매니저가 누가 가져갈까 봐 자기가 챙겨뒀다고 싱긋 웃는다.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서 주저앉을 뻔했다. 그제야 알았다. 거대한 공포는 거인이 내 몸을 한 손으로 꽉 쥔 것과 비슷한 육체적 경험이라는걸. 나는 모든 근육에 힘을 주고 있었고, 거인의 손아귀에서 풀려나자 피가 모조리 빠져나간 듯한 생경한 감각을 느꼈다.


노트북 분실에 그토록 큰 공포를 마주했던 건 그곳에 만 장에 가까운 사진과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글이라기보다는 낙서에 가까운 완성도 낮은 글이 뭐가 그리 소중하냐고 묻는다면 그러니 소중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노트북은 다시 사면 그만이지만, 그 미천한 언어와 시선은 다시 만나려야 만날 수 없는 그때의 기록이니까.


노트북 안에는 결코 잃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열 개의 문장들'이라는 제목의 워드 파일이다. 몇 년 전 어느 오후, 나는 우표를 한두 개씩 모으던 어린 날처럼 문장을 모으기로 했다. 하루에 열 개 정도씩, 내 마음에 닿은 문장들을. 길지 않은 문장들이 200 페이지가 넘게 쌓였다. 마음의 진정이 필요할 때 나는 그 파일을 가만히 읽는다. 그 행위는 내게 딱 맞는 호흡법 같은 기능을 한다.


그 파일을 자주 읽으니 문장이 때로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몇 번씩 읽으며 몸에 체화되듯 외워진 문장들은 확실히 그런 힘이 있었다. 어떤 이야기나 깨달음이 간절히 필요한 순간, 로또 추첨 기계에서 쏙 빠져나오는 숫자 볼처럼 마음 어딘가에 숨어 있던 문장 하나가 도착한다. 나는 가끔 그 문장에만 의지해서 하루를 보낸다.


'걸음이 멈추면 생각도 멈추고, 두 발이 움직여야 내 머리가 움직인다'라는 루소의 고백과 함께 걷는다. 누워 있고만 싶을 때 조지 쉬언의 문장이 나를 건드린다. '몸의 형태가 정신을 규정한다.' 하고 싶은 일이 마음속에서 몽글 피어오를 때 송길영 바이브 컴퍼니 부사장이 했다는 말을 상기한다. '일은 각오로 되는 게 아니고 시도로 움직일 때 이루어진다'. 책을 읽을 땐 은유 작가의 이 문장이 책갈피다. '좋은 글은 질문한다. 선량한 시민, 좋은 엄마, 착한 학생이 되라고 말하기 전에 그 정의를 묻는다.' 공부할 때 잊지 않는 고미숙 작가의 문장은 이것이다. '공부는 그 자체로 존재의 기쁨이자 능동적 표현이다.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아이에게 분노가 일면 <아직도 가야 할 길>의 문장을 떠올린다. '아이 앞에서 일관성 있고 변함없는 진지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선물이다'. 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바람이 스스로의 불안과 자괴로부터 위협받을 때 미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가 중 한 명인 앤 라모트의 글귀를 생각한다. '세상에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매일 놀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아직 무언가를 쓰고 있다는 것에 더욱 놀란다. <쓰기의 감각>' 매력적인 작가 이슬아의 생각을 읽으며 더 무심한 나를 꿈꾼다. '남에 대한 감탄과 나에 대한 절망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 반복 없이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기꺼이 괴로워하며 계속한다. 재능에 더 무심한 채로 글을 쓸 수 있게 될 때까지. <부지런한 사랑>'.


절망과 희망 사이를 반복하며 천재 고흐를 떠올린다. '열심히 노력했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영혼의 편지>' 우울해질 때는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 마지막 문장이 힘이 된다. '나는 날마다 살아 있기로 선택한다. 그것이야말로 드문 기쁨이 아닐까?' 상실이 나를 지배할 때 <상실 수업>의 '평화는 고통의 정중앙에 놓여 있다'는 문장을 떠올리고 슬픔에 기꺼이 내 몸을 맡길 것이다.


맥도날드에서 가방과 노트북을 끝내 잃어버렸다면 나는 어떤 문장에 기대야 했을까. 덜렁대는 스스로를 용서하기 위해, 더 꼼꼼하고 치밀한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오래 문장 사이를 유영했을 것이다.


앞으로 내 시간은 문장들을 발견하고, 기록하고, 당신에게 권하고, 그것에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며 채워질 것이다. 그것으로 아마도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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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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