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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Dec 08. 2022

선선한 거리에서 인간힘을 쓸 때

0개 국어의 세계

한국어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상황에서 5세 때 영어와 중국어에 동시에 노출된 심이. '심이는 3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하는 트라이링구어가 될 테니 너무 좋겠다'… 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심이가 텅 빈 거리를 달리는 차 안에서 중얼거렸다.


-거리가 선선하네.


순간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도 틀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뻔 했다. 골똘한 시간을 거쳐 거리가 선선하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있잖아. 사람 별로 없는 거”라는 해맑은 대답이 돌아왔다. 한산이 선선으로 묘하게 탈바꿈을 했다. 


버스에서 몸이 무거운 임산부를 보더니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저 분 임산 하셨나봐


임신하셨다는 맞고, 임산하셨다는 틀리다는 내게 심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임신부'와 '임산부'는 둘 다 맞는데 이건 왜 안되지?라고 했다. 그러게, 임산은 동사로 쓰이지 않는단다. 국어는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중국인이 내게 '차라리'와 '하물며'의 정확한 차이와 오지랖의 어원을 물어볼 때만큼이나 나는 당황했다.


얼굴을 구기며 ‘사건의 재구성’의 고음을 소화하는 내게 심이가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힘 쓰지 마. 


인간힘? 그럴 듯한 이 단어는 또 뭔가? 혹시 '안간힘'이냐고 물었더니 심이는 인간이 내는 힘이니 인간힘이지, 왜 안간힘이냐며 나를 나무랐다. 그러게, 왜 안간힘일까. 나는 잘난 척을 하고 싶어 안간힘의 어원을 찾아 국립국어원 홈페이지까지 뒤지다 어원을 확인할 만한 자료를 찾지 못했다는 답변만 확인했다. 의기양양한 심이는 거봐, 인간의 힘인데!를 반복했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내게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을 함께 보던 심이가 말했다. 엄마, 사실은 나도 저 오빠처럼 전생이 좀 기억이 나는데 말야... 나는 사실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어. 그때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이번 생에서는 읽기가 싫은 거야. 아이의 말투가 너무 심각하고 진지해서 웃지도 못했다. 이렇게 환상적인 논리라면 앞으로도 쭉 읽지 않겠다는 이야기인가? 싶었다.


3개 국어가 0개 국어로 수렴되는 느낌이지만 아무렴 어때서. 거리가 선선하고 인간힘을 쓰는 세계 또한 꽤 매력적이지 않은가. 아이는 앞으로 그 세계에서 더 많이 발견하고 고쳐나갈 것이다. 조바심을 등에 업고 미리 나서서 알려주고 싶지는 않다. 분명 아이 나름대로 발견의 놀라움과 기쁨이 있을 것이고, 그 순간 또한 오래 기억될 것이기에. 아이만의 단어가 늠름하게 세상에 등장할 때마다 나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니 그 또한 좋은 일이다.


아이의 질문은 많고, 나의 지식은 짧디 짧아서 네이버 지식백과 PR 방안을 짜던 시절보다 더 열심히 지식백과와 어학사전을 뒤진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이토록 우주적이고 총체적인 지식이 필요할 줄은 미처 몰랐다. 왜 예전에 백과 사전 전집이 집집마다 필요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밤. 너와의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엄마 또한 ‘인간힘’을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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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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