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러운 도시 코르도바
1.
아주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열 살의 내가 오랫동안 유럽을 여행했다면 조금쯤은 다른 인간이 됐을 거라고. 좋은 쪽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더 많은 것이 '궁금한 인간'이 되어 십 대를 보냈을 것은 확실하다고. 어린 시절 나는 국경 밖의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것이 별로 없었다. 친오빠는 외할아버지를 따라 하와이고, 일본이고 여행을 무지하게 다녔는데도 그랬다. 틈만 나면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가려고 하는 지금의 나를 떠올리면 신기할 정도의 무관심이었다. 여행지를 유럽으로 정했다고 했더니 어린 아이에게 과연 유럽이 재미있는 곳일지 걱정해 주시는 분들이 있었다. 사실 나도 내심 걱정이 되었다. 엄마의 바람과 아이의 흥미는 동떨어진 이야기 아닌가. 바르셀로나를 거쳐 코르도바, 그라나다, 말라가에 도착하자 심이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긴 동네마다 왜 이렇게 성당이 많아?
그때 나는 이 질문에 황당해 하지 않고 낄낄 거릴 수 있는 관대함을 이미 장착하고 있었다. '아이의 탄성은 짧고, 엄마의 탄식은 길다'라는 이번 여행의 명언이 이미 탄생했기 때문이고, 김연수 작가의 이 문장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시 와서 밤의 알람브라 궁전을 꼭 봐야지, 하는 초등학생 같은 다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여행에서 두 번 다시란 없으니까. 다시 왔을 때는 나는 그때의 그 사람이 아닐 테니까.
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아이가 조금 더 커서 왔다면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어 돈이 덜 아까웠겠지만 그 때는 이미 지금의 우리가 아닐 테니 이 여행의 진짜 의미는 '바로 지금'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김 작가의 믿음처럼 여행에 두 번 다시란 없으니까. 아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특히 유명한 건축물과 유적지들 앞에서 유독!!!) '요즘 초등학교 3학년생들이 좋아하는 영상과 유행하는 단어'를 우리에게 쉴 새 없이 알려주고 자유롭게 춤을 추는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촬영 감독에 빙의되어 스페인과 포르투갈 유명한 광장에서 대부분 무릎을 꿇었다.
2.
코르도바로 가는 렌페를 탔다. 빡빡한 일정 탓에 코르도바에는 들리지 않는 한국인들이 많지만 이슬람 통치 당시 '알 안달루스(당시 이베리아반도의 이름)'의 수도였던 코르도바는 여러모로 중요한 도시다. '안달루시아의 현관'이자 한때 인구 100만에 이르며 유럽에서 가장 앞선 문화를 꽃피웠던 중세 최대의 도시, 카톨릭 성당을 중앙에 품고 있는 스페인 최대 이슬람 사원 '메스키타'가 있는 곳이자 이번 여행지를 정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로마교가 있는 도시였다. 또한 세네카, 루카누스 등 유명한 철학자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찾아본 여러 정보는 나를 더 코르도바에 빠져들게 했다.
바르셀로나의 일정이 힘들었으니 코르도바에서는 쉬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텐디야스 광장 근처에 있는 호텔에 짐을 풀었다. H10 계열의 호텔이었는데 가격 대비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호텔 테라스에서 보이는 텐디야스 광장 모습도 밤낮 가릴 것 없이 흥미로웠다. 코르도바 사람들이 약속 장소로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이 바로 이곳, 텐디야스 광장이라고 했다. 부슬비가 내리는 코르도바 구시가의 첫 인상은 한 때 인구 100만의 도시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호텔 근처 마트에서 올리브와 클라라(스페인식 레몬 맥주)를 사서 방에서 마시다 로마교 야경을 보러 길을 나섰다. 과달키비르 강에 놓인 오래된 다리인 로마교는 로마 시대였던 1세기 경에 지어졌다. 14세기 알폰소 11세에 의해 지어진 킬라오라의 탑 전망대에서 로마교를 내려다 보면 내가 마음을 뺏겼던 바로 그 사진 속 광경을 목도할 수 있다. 유시민 작가가 <유럽 도시 기행 2>에서 체코의 카렐교가 '다리가 아니라 광장같았다'고 표현했는데 로마교 또한 그랬다. 로마교 위에서는 늘 누군가 버스킹을 하고 누군가 기도를 하고 있어서 오래 머물고 싶은 넓은 광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
3.
코르도바의 메인은 역시 스페인에 현존하는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인 메스키타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한 건축물 중 하나인 메스키타의 입장료는 13유로이지만 매일 아침 8시 반부터 9시 반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가히 너그럽다.) 이 시간을 이용해 이틀 연속 메스키타를 둘러보기로 했다. 심이의 컨디션이 떨어져서 이날 아침 산책은 나 혼자 하기로 했다. 로마교의 일출을 보고, 메스키타를 투어한 뒤, 코르도바 거리를 산책하는 코스였다. 어제 놀라운 야경을 보여준 로마교는 더욱 놀라운 일출을 보여줬다. 숨 막히는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스페인 건축가들에게 스페인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건축물을 단 한 개만 선택하라고 묻는다면 단연 코르도바 메스키타를 꼽는다고 한다. 몇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이슬람 모스크 사원 안에 대성당을 품고 있는 메스키타는 역사적으로도, 건축학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엄청난 의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모스크 사원 안에 대성당이라니... 사진을 이리저리 훑어봐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발길을 메스키타 쪽으로 옮겼더니 부지런한 여행객들이 문 앞에 벌써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드디어 8시 반, 메스키타의 문이 열렸다. 메스키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전율을 잊지 못한다는 후기가 여럿 있던데 실제로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건축물일수록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진리다. 그러니 관련된 역사와 인물, 사건들이 많고 많은 메스키타에서 필수적인 것이 바로 가이드다. 현장 가이드 투어를 알아볼까 하다가 '투어라이브'에 마침 코르도바 메스키타 관련 오디오 투어가 있어서 날름 다운로드했다. 세비야 건축대학을 졸업하고 스페인에서 건축가로 활동 중인 박성준 님의 목소리를 따라 메스키타를 관람했다. 오디오투어도 현장 가이드 투어와 마찬가지로 투어 시작 장소가 있고, 동선이 정해져 있다. 해당 스폿에 도착해서 오디오를 클릭하면 마치 가이드님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설명을 들을 수 있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시려는 가이드님의 열정에서 안달루시아 지역을 향한 무한한 애정이 느껴졌다. 자신의 업과도 관련이 많으니 설명이 전문적인 것은 물론 목소리&딕션도 좋아서 귀에 쏙쏙. 싸고, 자유롭고, 이렇게 전문적이라니... 유럽 도시 투어의 신세계를 만났다.
두 개의 겹 아치로 만들어진 800개의 기둥들 사이로 몸을 사리듯 숨겨져 있는 대성당과 예배당, 아름다운 천장을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 예배당이 이곳에 이런 모습으로 있기 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 이야기들이 필요했을까? (예배당은 3대에 걸쳐 지어졌다고 한다) 메스키타의 예배당을 처음 본 왕 카를로스는 “어디에나 있는 성당을 하나 세우느라, 어디에도 없는 소중한 사원을 훼손하고 말았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하던데, 그래도 덕분에 이슬람과 스페인 문화가 제대로 융합된,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 탄생한 것은 확실하다. 이 메스키타를 보려고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몰려 들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인상적인 이들은 유럽 중, 고등학생들의 무리였다. 아마도 수학여행을 온 것 같았는데, 우리 나라 학생들이 경주로 몰려 가는 것과 같은 이치겠지. 오랜 세월을 거쳐서 완성된 공간인 만큼 고딕, 아라베스크, 무데하르 등 다양한 양식이 섞여 있다. 메스키타를 보고 있자니 유럽의 건축 양식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 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서 출구로 걸어가는데 대성당에서 흘러나오는 오르간 소리. 전율을 여러 번 느낀 코르도바의 첫 번째 아침이었다.
4.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인 코르도바 구시가지의 골목을 정처 없이 걸었더니 유명한 포트로 광장(포트로는 망아지라는 뜻이다)에 도착했다. 이 작은 광장이 유명한 이유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실제 세르반테스가 이 근처 여관에 머물며 글을 썼다고 한다. 조금 더 걸어가면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을 닮은 코레데라 광장이 나온다. 이 광장은 오페라 '카르멘'에서 집시 처녀 카르멘과 투우사 루카스가 만나던 장소다. 아침의 광장은 조용했다. 밤이 되면 이 고요한 광장이 얼마나 들썩거릴지... 안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감동적이었던 아침 산책을 끝내고 근처 마켓에 들러 커피와 크로아상을 사서 아이와 남편이 뒹굴고 있을 호텔로 걷는다.
코르도바의 전통 음식은 소꼬리찜과 살모레호다. 구글 리뷰 3,700개가 넘는 맛집 살리나스(Salinas)에서 소꼬리찜을 먹었는데 한국의 갈비찜과 비슷한 맛이었다. 가격도 14유로 정도로 저렴했다. 살모레호는 토마토, 빵, 올리브오일 등을 첨가하여 만든 수프다. 비주얼만 봐서는 맛이 있을 것 같지 않았는데 빵에 찍어 먹으니 의외로 별미였다. 한 그릇을 싹싹 비웠다.
코르도바에서는 유난히 마음이 편안했는데 도시가 보여주는 관용의 공기 때문이 아니었나 한다. 예전 코르도바의 이슬람인들은 다른 종교와 다른 민족도 너른 마음으로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로마 시대에 지어진 로마교 위에서 대성당을 품은 메스키타를 바라보다 길을 나서면 아름다운 유대인 거리가 있다.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의 세 가지 종교가 혼재할 수 있었던 중세 전기의 코르도바. 로마교 중간 지점에는 코르도바 수호성인인 대천사 라파엘 석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 앞에는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를 담은 촛불이 흔들리고 있다. 종교적 심성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석상 앞에 서면 경건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5.
아이는 코르도바 체류 둘째 날 오전 미열이 나서 하루 종일 호텔에서 쉬었다. 춘과 나는 번갈아가며 코르도바라는 도시를 산책했는데 이런 형태의 여행이 주는 매력이 있었다. 혼자 도시를 쏘다니니 마치 배낭여행을 하는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 자유로웠고, 아이는 호텔에서 쉬며 에너지를 잔뜩 충전했다. 혼자 산책을 마친 춘의 사진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내가 놓쳤던 도시의 풍경과 이야기들이 그의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밤에는 와인을 기울이며 혼자 발견한 도시의 모습들을 나누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런 '각자 산책'은 한 명이 새벽 산책을, 다른 한 명이 밤 산책을 하는 식으로 여행이 끝날 때까지 매 도시 계속 됐다. 여행도 인생과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함께라서 무척 행복하지만 고독한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를 더 사랑하기 위해 때로 떨어져야'만' 한다.
내가 만난 안달루시아 지역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애정을 티 내지 않아도 그것이 줄줄 흘러넘친다는 것이다. 안달루시아가 너무 좋아서 여행 후 세비야에 눌러 앉아 버렸다는 12년 전 한인 민박 집 사장님도 그랬고, 열정적으로 메스키타와 안달루시아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신 세비야 건축가님도 그랬다. 그만큼 한 번 빠지면 출구를 찾기 힘든 것이 안달루시아 지역의 매력인 것 같다. 그 핵심은 이슬람과 유럽 문화의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조화라는 것을 코르도바에서 어렴풋이 느꼈다. 그라나다와 세비야는 나의 느낌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이번 여행의 징크스는 일정의 마지막 날에 도시의 날씨가 화창해진다는 것이었는데 코르도바가 그 시작이었다. 내내 비가 오고 추웠던 코르도바는 마지막 날 끝내주는 날씨를 보여주며 안 그래도 떠나기 싫은 내 마음을 붙잡았다. 칼라오라 탑 전망대에서 햇살을 맞으며 로마교와 그 너머 코르도바 구시가지를 아주 한참 바라봤다. 로마교 끝자락에서 아름다운 기타 선율을 선보이는 연주자 바로 옆으로 백마를 탄 경찰들이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공감과 댓글은 지속적인 콘텐츠 업로드에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