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브라 궁전과 타파스, 그리고 이베리코

사랑할 수밖에, 그라나다

by 심루이


1.

해외여행의 로망 중 하나는 멋진 차를 렌트해서 현지의 아름다운 길을 달리는 일이다. 그 로망은 신혼여행으로 떠난 하와이 마우이 섬에서 처음 실현됐다. 무려 컨버터블. 그런데 문제는 결혼 준비에 시달린 내가 너무 피곤했다는 것. 눈을 감으면 안 되는데 자꾸 눈이 감겼다. 결국 몇 분 만에 나는 그 멋진 풍경을 옆에 두고 미친 듯이 헤드뱅잉을 하고 있었다. 오픈 카에서 침까지 흘리며 고개 춤을 추는 나를 보고 춘은 조용히 차의 지붕을 닫았더랬다.


그 이후 거주했던 중국을 제외하고 실로 오랜만에, 그리고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차를 렌트했다. 기아 차를 빌렸는데 스페인 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 말고는, 렌터카 비용이 싸다고 좋아했는데 올케어 보험료가 렌터카보다 훨씬 비쌌다는 사실 말고는 우리의 렌터카 여정은 무난하게 시작됐다. 코르도바에서 늦장을 부리다 아주 늦게 그라나다로 출발했다. 스페인에서 우리의 첫 질주가 시작된 것이다. 처음 달려 본 스페인 고속도로는 컴퓨터 윈도우 배경 화면과 아주 유사했다. 게다가 터널이 적고 아주 정직한 오르막, 내리막 형태의 길이 많아서 춘은 운전하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 나도 흡사 롯데월드 놀이 기구 '신밧드의 모험'을 타는 기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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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라나다는 아주 오묘한 도시다. 죽기 전에는 꼭 봐야 할 것 같은 알람브라 궁전을 가졌고 음료를 시키면 무료 타파스(작은 크기의 안주)를 주는 관대한 도시이면서 재미있게 본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촬영지. 하지만 숨어 있는 이야기를 알아가다 보면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슬람 나스르 왕조가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했지만 끝내 사수하지 못했던 최후의 도시, 마지막 왕이었던 보압딜의 눈물을 생각하면 어쩐지 슬픈 마음이 든다. 하지만 보압딜과 싸워 끝내 스페인 통일로 '레콩키스타'를 완성하고 콜럼버스까지 후원한 이사벨 여왕의 짧은 삶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스페인 국기 아래에 있는 석류 이미지가 그라나다(=스페인어로 석류)라는 것을 깨닫고 무릎 꿇은 콜럼버스의 보고서를 읽고 있는 이사벨 여왕의 동상까지 찾게 되면 그라나다라는 도시를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진다.


이렇게 사연 많은 도시, 그라나다에 도착해서 우리가 처음 한 일은 '한식당'에 간 것이었다. 한국인 관광객이 붐비는 도시답게 그라나다에는 한식당이 많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심이는 코르도바에서부터 메뉴를 고민하며 한껏 들떴다. 누가 보면 한국을 떠난 지 몇 개월은 된 줄 알겠지만 우리의 여행은 고작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바르셀로나에서 햇반에 장조림에 라면까지 먹지 않았는가. 어쨌거나 우리는 숙소 바로 옆에 위치한 한식당으로 달려가 순두부찌개와 돌솥비빔밥,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시켰다. 한식당 벽에는 어찌 된 일인지 송중기님과 송혜교님 사인이 나란히 걸려 있어서 비하인드 스토리를 자꾸 상상하게 됐다. 내가 이 한식당 사장이라면 이 사인을 떼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에 휩싸일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이 많은 질문을 할 테니 귀찮기도 할 테지만 막상 떼자니 그들은 너무나 월드 스타라 호객 행위에 꽤 도움이 될 것 같고... 그러다가 또 귀찮고... 뭐 그런 고뇌가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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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음 날은 대망의 알람브라 궁전 투어가 있는 날이다. 다들 알람브라 궁전 투어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체력이라고 알려준 까닭에 우리는 푹 자고 슬슬 길을 나서 정의의 문을 지나 알카사르로 향했다. 2월이니 여행 비수기가 확실한데, 알람브라 궁전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라나다에 온 관광객 중 이곳을 오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수기에는 얼마나 사람이 미어터질지 짐작할 만했다. 그러니 당신이 그라나다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알람브라 궁전 티켓을 예약이 되어야 한다.


기대 없이 알카사르 탑 위로 갔는데 그곳에서 바라본 그라나다 알바이신 지구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다. 오밀조밀 붙어 있는 새하얀 집과 붉은 지붕,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골목들... 그 모습을 보자마자 탄성이 새어 나와서 사진과 영상을 무차별하게 찍어댔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나스르 궁전이다. 현빈이 드라마에서 멋지게 걷던 '아라야네스' 정원에서 알람브라 대표 사진을 찍고 물의 정원, 헤네랄리페 궁전으로 향했다.


알람브라 궁전의 경이로움과 디테일은 미숙한 언어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것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느껴야 하는 성질의 것이고 알람브라 궁전 투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체력이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 아니 이틀 동안 봐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투어가 4시간이 넘어가자 심이는 지쳤고 나는 이 여정을 얼른 끝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알람브라에서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을 서둘러 했다. 바로 햇살을 맞으며 타레가의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듣는 것. 스페인의 대표 기타 연주가 타레가는 낯설어도 이 기타 선율을 모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헤네랄리페 궁전에서 흐르는 물의 소리를 듣고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하니 물의 정원에서 출구 쪽으로 난 아름다운 길 위에서 듣는 이 선율의 의미는 상당하다. 그 순간만큼은 나스르 왕조의 공주든, 이사벨 여왕이든 누구로든 빙의할 수 있을 것 같은 특별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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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픈 배를 달래러 타파스 집으로 향했다. 타파스는 술과 곁들여 먹는 간단한 음식으로 타파(tapa)는 '덮다'라는 뜻을 지닌 타파르(tapar)에서 왔다. 먼지나 벌레가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와인 잔 위에 소시지나 빵을 얹은 것에서 시작됐다. 그라나다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바에서 음료나 주류를 시키면 무료로 제공되는 타파스 때문이다. 음료 1잔을 시키면 타파스 1개, 2잔 시키면 타파스 2개가 나오는 형태의 통영 다찌집스러운 너그러운 제도다.


이 제도의 연장선상에서 '타파스 바투어'라는 문화도 있다. 타파스 바에 들어가 (달랑) 한 잔만 먹고 자리를 옮기는 식으로 서너 개의 바를 체험하는 것이다. 각 타파스 바마다 무료로 제공되는 타파스가 다르고 특색 있으니 이 무슨 알콜 좋아하는 이들을 홀리는 문화란 말인가. 가기 전에 여러 후기를 통해 실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경험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었던(유니콘 같은 느낌으로다가), 신비롭게 느껴졌던 문화. 가보니 실재했다!!! 정이 넘치는 따뜻한 대인배 도시. (그 어떤 찬사도 부족하도다.) 며칠 전 코르도바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그라나다에 홀딱 반해버렸다. (공짜 안주 때문만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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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골목 산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알바이신 지구 및 근처 골목들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의 서희석 저자는 가톨릭과 이슬람이 공존하는 문화에 반해 이곳에 정착해서 안달루시아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 <한 권으로 읽는 스페인 근현대사>도 집필했다. 저자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대표 도시 세비야와 그라나다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슬람의 색채가 묻어있는 유럽의 매력적인 도시가 세비야라면 그라나다는 유럽의 색이 훑고 지나간 이슬람 국가의 도시


유럽 느낌 뿜뿜하는 그라나다 대성당과 몇 발자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알카이세리아 재래시장, 모로코 골목 어딘가를 연상시키는 알바이신 떼떼리아 거리를 걷다 보면 이 표현에 격하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라나다는 유럽과 이슬람 문화가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며 공존하고 있었다.


이슬람 사원이 있던 곳에 새롭게 세운 그라나다 대성당은 1518년 엔리케 에가스의 설계로 시작됐고 고딕과 르네상스, 무데하르 형식이 섞여 있는 건축물이다. 근처에는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2세의 유해가 있는 왕실예배당과 아랍의 교육기관인 마드라사가 있다. 이어서 알바이신 떼떼리아 거리를 걷다 보면 알람브라 궁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산 니콜라스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에서 일몰 시간에 바라보는 불 켜진 궁전과 만년설이 쌓인 시에라 네바다 산맥은 더욱 아름답다. 김연수 작가가 '불 밝힌 알람브라를 올려다보는 건 꼭 이루고 싶은 꿈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썼었는데 그 때문인지 그 시간, 노을에 잠긴 알람브라를 바라보며 맞잡은 몰캉한 아이 손은 이루고 싶었던, 혹은 이루고 싶은 꿈의 감촉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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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어젯밤, 혼자 타파스 투어를 한 춘도 짧은 시간에 그라나다에 마음을 뺏긴 것처럼 보였다. 내게 미안했는지 소감을 아끼는 모습이었지만 그 밤에 타파스 바마다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와인을 따라주는 백발의 할아버지가 얼마나 멋졌는지 얘기하면서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가 어젯밤의 환희를 알려줬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질투를 안달루시아식 츄러스를 흡입하는 걸로 달랬다. 안달루시아 스타일은 바르셀로나의 얇고 바삭한 츄러스와 달리 두껍고 덜 달아서 중국의 요우티아오와 매우 흡사했다. 중국에서는 또우장에, 이곳에서는 뜨거운 초콜릿에 찍어 먹는다는 것이 다를 뿐. 츄러스의 기원이 중국에서 왔다는 설도 있던데 이것을 맛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비브람블라 광장의 '츄레리아 카페테리아 알함브라'의 츄러스가 제일 유명한데 1인분도 양이 꽤 많으니 먹어보고 추가 주문하는 것이 좋다.


그라나다에는 유명한 이베리코 스테이크 맛집이 있었는데 불향이 끝내 준다고 했다. 첫 번째 방문에는 대기 줄이 길어서 실패했고, 그라나다를 떠나기 전에 '오픈런'을 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깨닫게 되는 사실 중 하나는 조금 유명한 곳이 아닌 '아주' 유명한 곳은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3주간 많은 이베리코를 만났지만 그라나다 <Entrebrasas Granada>에서 먹은 이베리코가 단연 일등이었다. 음료와 함께 나오는 무료 타파스도 이베리코 스테이크인데 맛있다. 하루 더 머물렀다면 무조건 한 번 더 방문했을 것이다.


스페인의 주요 고기는 돼지고기다. 와타나베 마리의 <세계사를 품은 스페인 요리의 역사>에 따르면 스페인 쇠고기 생산은 전체의 26% 밖에 되지 않는다. 같은 지중해 연안 나라인 이탈리아가 60% 이상, 프랑스가 50% 이상이라고 하니 현저히 낮은 편이다. 험한 산악지대가 많고 목초가 잘 자라지 않아 소를 키우기가 어려울뿐더러 5세기부터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했던 서고트족이 돼지고기를 좋아했던 영향도 크다. 스페인 육류 생산량 1위는 돼지로 약 38%, 그 뒤를 양/산양(15%)이 잇고 있다.


스페인 돼지고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하몬인데 이는 돼지 뒷다리를 잘라 소금에 절이고, 건조시켜 6개월에서 2년 이상 숙성시킨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앞다리 살을 사용한 것은 '빨레따'라고 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명절이나 생일에도 하몬을 선물로 주고받는다고 한다. 생일 선물로 돼지 뒷다리라니... 낭만은 다소 떨어지지만 내게는 꽃보다 훨씬 완벽한 선물이 될 것 같다.


이베리코 스테이크와 '띤또 데 베라노'의 조화는 완벽했다. '여름의 레드와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띤또 데 베라노는 레드 와인과 탄산수, 얼음을 넣어 시원하게 마시는 술이다. 그간 더 익숙하게 마신 샹그리아보다 훨씬 덜 달고 청량감이 있어서 여행 중반부터는 주로 이것을 마셨다. 같은 방식으로 레드 와인 대신 셰리 와인을 섞은 것은 '레부히또'라고 한다.


환성적인 점심을 마무리하고 춘은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주차장에서 차를 가지고 이사벨 광장 쪽으로 왔다. 스페인 호텔은 투숙하더라도 주차비를 따로 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 호텔 주차장이 부족하면 다른 곳에 주차해야 했는데 그라나다 마퀴스호텔이사벨스가 그랬다. 그러니 렌터카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예약 시 주차장의 위치와 주차비에 대해서 미리 호텔과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 더 안전하고 안심되는 렌터카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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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공감과 댓글은 지속적인 콘텐츠 업로드에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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