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꿈

네르하 파라도르에 갑시다

by 심루이

1.

스페인 최고의 휴양지로 불리는 태양의 해변, 코스타 델 솔(Costa del Sol). 그중 가장 낭만적인 동네라는 네르하에서 처음으로 '파라도르'에 묵기로 했다. 파라도르는 중세 시대의 고성, 수도원, 병원 등 역사적인 건물을 숙소로 개조한 공간으로 스페인 전역에 100여 개가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네르하, 론다, 톨레도의 파라도르가 유명한데 우리도 네르하, 론다의 숙소를 파라도르로 정했다. 네르하 파라도르는 전 세계 안 가 본 곳이 없는 친오빠 앤드류가 본인이 간 숙소 중 가장 좋았다고 엄지 척을 날린 장소라 특히 기대가 됐다.

뜨거운 햇살이 일 년 내내 쏟아진다는 아름다운 해안 지역으로 향하는 길에 차가 휘청거렸다. 창문을 살짝 열어보니 태풍급 대형 바람이 얼굴을 강타했다. 네르하의 따뜻한 햇살을 잔뜩 기대하고 있던 나로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겨울이 상대적으로 따뜻한 유럽을 고르고 골라 2월의 스페인으로 왔건만... 바르셀로나가 생각보다 추워서 당황했지만 우리에게는 스페인 남부가 있다고 위로했건만... 비 오는 코로도바에서 태양의 해안으로 가면 모든 게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건만... 남부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건 몸을 가눌 수조차 없을 정도의 강풍이라니... 그저 슬플 뿐.


바람은 지중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유럽의 발코니(발콘 데 에우로파)'라는 광장에서 최고에 이르렀다. 이 낭만적인 이름은 19세기 알폰소 12세가 이곳의 풍광에 감탄하며 붙인 이름이다. 발코니 중앙에 그려져 있는 별 모양 한가운데 서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내려오기도 하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를 반겨준 네르하의 강풍은 '40년 인생 바람' 수준의 강력함이라 소원은 커녕 가만히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긴 머리카락이 솟구치며 무수히 뺨을 때려서 얼얼했다.


나는 '날씨를 바꿀 수 없다면 내 마음을 바꾸면 된다'라는 날씨를 받아들이는 성숙한 여행에 대해 오래 생각해 왔고 이 시간은 어쩌면 그 마음가짐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였다. 머리를 짜내어 바람을 즐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했는데, 그것은 강풍 속에서 누가 더 오래 발을 떼지 않고 버티는지 하는 게임이었다. 마주 보고 서서 서로의 손바닥을 미는 게임도 추가했더니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아이와 함께 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아이보다 유치해질 때가 많은데 이때가 그랬다. 나도 모르게 승리를 위해 온몸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었더니 심이는 그런 내 모습이 웃긴지 배를 접고 깔깔 웃었다. 먼 훗날 아이는 날씨의 재앙이 찾아온 이곳을 엄청 재미있었던 스팟으로 기억하게 된다.


IMG_5402.JPG 알폰소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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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네르하에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네르하 파라도르의 특별한 서비스 중 하나인 아래쪽 해변으로 바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는 수리 중이었다. 내려갈 필요성을 딱히 느끼지 못했던 우리에게 그것은 별 아쉬움을 주지 못했다. 네르하 여정의 우리의 유일한 목표는 지중해를 원 없이 바라보는 것.


네르하 파라도르 정원에서 밤에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별을 보고 (물론 맥주를 마시며), 새벽에는 잠옷을 입은 채 몇 발자국 걸어나가 세상을 녹여버릴 듯이 강렬한 일출을 봤다. 그리고 햇살 샤워를 하며 선베드에 누워 있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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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인과 함께 할 만한 낭만적인 곳이라는 평가가 있는 네르하 파라도르에는 노부부가 많았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노부부를(게다가 모두 웨스터너), 한 번에 본 건 처음이어서 신기했다. 탁 트인 지중해를 바라보며 노부부 서른 쌍 정도에 둘러싸여 조식을 먹었다. 동양인 대표로서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와인도 한잔했다.


그렇다. 당신은 이미 눈치챘겠지만 네르하 파라도르 완벽함의 마지막 2프로는 조식에 있는 와인에 있었으니(왓 어 어메이징 플레이스!) 오전 9시에 와인을 마셔본 것은 (술에 진심인) 내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많은 하몽과 치즈의 변주 앞에서 망연자실하며 '유럽 호텔 조식은 먹을 게 하나도 없다'라고 투덜거리는 심이에게 한없이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 아름다운 공간에 무덤덤하게 동화되어 있는 수많은 노부부들을 어쩐지 부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서양인 답지 않게 무뚝뚝함이 넘쳐흐르는 커플도 있었고(서양인들은 동양인보다 확실히 다정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다), 아침부터 와인을 기울이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노부부도 있고, 싸운 게 분명해 보이는 커플도 있었다. 다양한 부부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문득 어제 <기차와 생맥주>에서 읽은 최민석 작가의 문장이 떠올라 낄낄거렸다. 궁금해하는 춘에게 알려 준 문장은 이것이다.


-결혼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우주가 만나서, 20평 내외의 아파트에 몸과 영혼과 라이프스타일을 구겨 넣는 것이다.


평형은 다소 차이가 날 수 있겠지만 나머지는 반박하기가 힘들 것이다. 구겨 넣다가 충돌하고 튕겨 나오다가 다시 구겨 넣고 뭐 그런...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린 너무 잘 구겨 넣은 거 같은데, 그것이 춘의 일방적인 희생에 기반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괜스레 미안해졌다. 와인을 들이붓는 내 옆에서 이따 차를 몰아야 하는 춘은 와인을 쳐다만 보고 있었기에 더욱 미안해졌다.


최민석 작가는 이렇게 덧붙였다.


-알고 보니 결혼은 두 개의 우주가 만나서, 하나의 우주를 시원하게 인수합병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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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르하 파라도르 조식과 와인
IMG_5546.HEIC 지중해를 바라보며 먹는 조식

4.

네르하는 어제의 강풍에 실망한 우리를 달래듯 최고의 일출과 (체크아웃 시간 2시간 전부터) 최고의 햇살을 선물했다. 말라가에 가기 전 프리힐리아니에 들리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지만 우리는 과감하게 프리힐리아니를 포기하고 네르하 파라도르 썬베드에 누워 있기로 했다. 이 얼마나 기다리던 스페인 남부의 햇살 샤워던가!!! 우리는 누워서 각자 좋아하는 일들을 했다. 나는 맥주를 땄고, 책을 읽었으며 심이는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춤을 췄다. 춘은 '눕자마자 3초 만에 잠들기'라는 최고 장기를 선보이며 코를 골았다. 무방비 상태에서 맞이한 햇살이라 얼굴이 꽤 타버렸지만 최고의 시간이었다. 전기순 작가가 <나의 안달루시아>에서 네르하에는 '아이스크림 같은 다정함''강렬하지 않은 미지근한 평온'이 있다고 적었는데 그것을 아주 짧게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여행의 화양연화를 꼽아야 한다면 네르하의 시간을 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햇살 아래서 우리는 그 누구도 부럽지가 않았으니까. 그러니 그 시간의 배경음악은 장기하의 <부럽지가 않어>가 어울렸다.


야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한 개도 부럽지가 않어


말라가로 떠나야 했기에 행복한 시간은 짧고도 짧았지만 원래 모든 완벽한 것들은 짧게 스쳐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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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내 선베드에서 50m 떨어진 곳에는 핑크색 꽃무늬 의상을 곱게 차려입고 선베드에 누워 햇살을 만끽하고 있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그분을 보자마자 내가 꿈꾸는 미래라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무루 작가의 꿈이기도 한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를 꿈꾸고 있다. (무루는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라는 책의 저자다) 본문에 나온 정확한 문장은 '기왕이면 재미있고 신기하고 이상하고 궁금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209p)'이다. 이상하고 궁금한 할머니라니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다.


나는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서 지금 '이상하고 자유로운 엄마'가 되기 위한 작은 시도들을 하고 있다. 다소 충동적으로 떠나온 이 여행에서 이른 아침에 혼자 열정적으로 도시를 산책하는 것도, 투어라이브 크루에 덜컥 지원하고 합격해 핀란드 헬싱키의 한 카페에서 온라인 발대식에 참석하는 것도, 심이에게 아침마다 중국어나 영어, 때론 오페라 배우처럼 노래로 대화를 시도하는 것도 모두 그 일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심이에게 나의 포지셔닝은 무엇보다 '웃긴 엄마'인데, 그건 내가 정말 아이 앞에서 유머 감각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아이와 함께하는 세상은 (적어도 내게는) 모든 검열이 사라진 세상이다. 희한한 표정도, 엉뚱한 포즈도 술술 나온다. 그리하여 내가 아이에게 얻은 최고의 타이틀은 '세상에서 제일 웃긴 사람 = 엄마'인데(최근 심이 반 남자친구가 다크호스처럼 등장해서 나와 1,2등을 다투고 있어서 매우 초조하다.) '웃겨'가 '우스워'가 되는 것을 조금쯤은 경계하기 위해 가끔 각성하지만 '우스운'이 되면 뭐 어떤가 싶기도 하고.


'타인은 내가 모르는 낯선 세계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계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이방인들이다. 그리고 끝내 닿을 수 없는 섬 들이다'라는 무루의 문장에 적극 동의한다. (이방인끼리 가끔 인수합병을 할 뿐...) 13년 넘게 한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있는 춘도, 내 배 아파 낳은 심이도 그저 타인이고 낯선 세계이자 끝내 닿을 수 없는 섬일지도. 어차피 닿을 수 없는 거라면 더욱 우스워지고 즐거워져도 무방하지 않은가, 그것이 오히려 서로에게 더 큰 기쁨이지 않은가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나는 네르하 파라도르에서 가끔 이렇게 강렬한 햇살 아래서 인생의 고통이나 아픔, 슬픔 따위를 바짝 말려버리고 싶을 때 서로의 곁에 나란히 누워있겠다 다짐했다. 그것이 타인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에 슬픔이 밀려왔지만 나는 네가 있는 곳이 그 어디라도, 언제라도 달려가 기꺼이 햇살 아래에 함께 누워 있을 것이다. 그것이 결국 우리 인생의 화양연화가 되어줄 것임을 안다.

IMG_5578.HEIC 나의 워너비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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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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