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위 아름다움, 론다

누에보 다리와 함께 한 시간

by 심루이


1.

저번 스페인 여행에서 들리지 않아 가장 아쉬웠던 도시는 론다였다. 많은 이들이 론다를 인생 도시로 꼽기도 했고, 이후 꽃보다할배, 짠내투어 등 여행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론다의 절경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특히 짠내투어의 셀럽들이 누에보 다리를 처음 보고 놀라는 모습이 생생해서 궁금증은 배가됐다. 자연스럽게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도시 중 하나가 바로 절벽 위 도시, 론다였다. 바르셀로나에 가우디가 있고, 그라나다에 알람브라궁전이, 말라가에 피카소가 있다면, 론다에는 누에보 다리가 있다. 120m 깊이의 움푹 팬 타호 협곡 위에 놓인 누에보 다리. 무려 1793년에 완공되었다. 론다에서 누에보 다리만 제대로 봐도 여행의 반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론다 파라도르에는 방에서 편안하게 누에보 다리를 감상할 수 있는 룸이 8개가 있는데 방 배정이 선착순이라 말라가에서부터 서둘렀다. 열두시 반에 도착하자마자 체크인을 한 결과 '바로 그 방'에 배정받을 수 있었다. 좋은 방은 대부분 한국인 차지라는 소문이 있던데 역시 한국인의 근면 성실함은 외국에서도 빛을 발한다.


네르하 파라도르에 자유로운 발랄함이 있었다면 론다 파라도르는 고풍스러움 그 자체였다. 파라도르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완벽한 순간을 선사하기 위해 준비된 것처럼 어디선가 감미로운 아코디언 소리가 들렀다. 파라도르 아미고 회원에게 주는 웰컴 드링크로 고른 달달한 론다 와인을 홀짝이며 아코디언 소리를 배경 삼아 누에보 다리를 보고 있자니 순간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오래 기억에 남을 1박이 시작되고 있었다.


IMG_6295.JPG 멀리서 바라본 론다 파라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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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에보 다리를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서쪽 전망대 <Mirador Puente Nuevo de Ronda>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헷갈리지 않고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은 우선 구글맵에서 <마리아 광장(Plaza de Maria Auxiliadora)>을 찍고, 광장에 도착하면 보이는 길을 따라 아래로 10분 걸어가면 된다. 전망 포인트 2개 중에 더 아래쪽이 우리나라 유명 연예인들이 사진을 찍어 더욱 유명해진 스팟이다. 이곳에서 찍은 사진은 이번 여행의 베스트 컷이 되었다.


다리 위에서 보는 론다의 협곡은 소름 끼치게 아름다웠지만 다리 아래 공간은 사실 스페인 내전 기간에 감옥이자 고문 장소로 쓰였으며 몇몇은 골짜기 아래로 떨어져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론다에 있을 동안 아이는 종종 멍하게 다리리 아래 아찔한 협곡을 바라봤다. 3주의 시간 동안 역사가 이렇게 조용하게 아이에게 말을 걸어주는 순간이 종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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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디오 가이드를 귀에 꽂고 론다 시내를 천천히 걷기로 했다. 헤밍웨이가 소설을 집필하고, 투우의 발상지이기도 한 론다는 숨겨진 이야깃거리가 많다. 우선 론다 파라도르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무려 1785년에 완공된 론다 투우장이 있다. 가이드를 들으며 3대에 걸쳐 유명한 투우사를 양성한 페드로 가문과 프란시스코 로메로에 대해서 알게 됐다. 프란시스코 로메로는 77세의 나이에 마지막 승리를 따낼 정도로 엄청난 선수였으며 매년 9월 초에 그의 이름을 딴 투우 축제가 있을 정도다. 투우장은 론다 전망대(Mirador de Ronda)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이름을 딴 산책로로 이어진다.


헤밍웨이는 론다에서 노벨상 수상작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집필했다. 종전 후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스페인 가구로 집을 채울 정도로 스페인에 대한 애정이 컸다고 한다. 산책로를 걸으니 심이가 불쑥 헤밍웨이는 몇 시에 이곳을 걸었는지 묻는다.


이슬람 민족에게 중요했던 목욕 문화의 흔적인 아랍식 목욕탕(Banos Arabes)과 계단을 통해 누에보 다리 아래 아찔한 협곡으로 내려갈 수 있는 무어 왕의 집(La Casa del Rey Moro)을 거쳐 '올드'라는 뜻을 가진 비에호 다리(Puente Viejo)까지 걸었다. 바로 옆 쿠엔카 공원에서 바라보는 론다의 풍경이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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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6192.HEIC 헤밍웨이 산책로와 론다 전망대


4.

타파스 맛집 레추기타(Lechugita)를 찾아갔다. 이번에 여행 예능 프로그램 '짠내투어'에 소개된 맛집 중 2개를 갔는데 그중 첫 번째 집이다. '상추'라는 이름을 가진 이 집은 찐 로컬 맛집인 듯 오후 세 시라는 애매한 시간이 무색하게 사람이 붐볐다. 이미지가 없는 메뉴판을 한참 동안 '연구'하다 상추 샐러드와 새우꼬치, 나초와 과카몰리, 버섯을 주문했다. 버섯과 새우꼬치는 너무 맛있어서 하나씩 더 시켰다.

론다의 소꼬리찜이 유명하지만 우리는 이미 코르도바에서 원 없이 먹었기에 저녁은 파라도르 방 안에서 누에보 다리를 배경으로 간단히 해결하기로 했다. 템프라니요, 까쇼, 쁘띠 베르도 등을 블렌딩했다는 론다 와인을 마켓에서 구입했다. 달달한 론다 와인을 마시며 파라도르 테라스에 앉아서 누에보 다리 야경을 감상했다. 밤의 론다는 인적이 드물었다. 론다에서 1박을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고즈넉하고 쓸쓸해 보이는 론다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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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행 10일이 넘어가면서 연속 서른 끼가 넘는 식사를 셋이 함께 하고 있다. TV도 없이, 오롯이 셋이 마주 보고 앉아서 이야기와 함께 하는 식사다. 장기 여행을 또 떠나지 않는다면 두 번 다시 할 수 없을 경험이겠지. 24시간 함께 하니 이제 이야기 소재가 떨어질 법도 하지만 오히려 하면 할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참, 신기한 일이다. 이 여행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이에게 담겨 있던 이 수많은 이야기들을 언제쯤 찾아냈을까?


이번 여행에서 함께 하고 있는 무루의 책 중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대화의 깊이는 관계의 거리가 아니라 경청하는 태도에 있다'. 이번 여행의 길고 긴 '밥시간'이 알려준 교훈과 비슷해서 밑줄을 그었다. 다섯 페이지를 더 넘기면 이런 문장이 있다.


-지난 모든 날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언제나 오늘의 나만큼만 산다. 어제를 고칠 수 있거나 내일을 내다볼 수 있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지혜도 그런 방법을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그러니 언제나 최선은 자신을 믿고 매 순간 가장 나다운 걸음걸이로 걷는 일일 뿐.


여행도 삶도 참 똑같다는 생각을 한다.


IMG_6278.JPG 이번 여행의 베스트컷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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