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에서는 산책을

여행을 하며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

by 심루이


1.

베이징에서 귀국 후 일년 간의 한국 생활을 뒤돌아보면 늘 바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지만 공허할 때가 많았다. 베이징에서도, 서울에서도 나는 이방인에 가까웠고 여전히 제일 잘 하는 일은 길을 잃는 일이었다. 나이 마흔에 찾아온 것이 생의 불안정성은 언제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선고 같은 깨달음이라니, 그것은 절망적이면서 희망적이었다.


그러니 결국 생의 관건은 불안을 잘 껴안고 살아가는 데 있다. 불안과 동고동락하며 발견한 또 다른 사실은 불안이 가장 힘을 쓰지 못할 때는 무언가에 몰입하고 있을 때라는 것이다. 목표를 짧게 잡고 몰임감을 자주 느끼는 삶에 가느다란 희망이 있을 것 같았다.


길을 걸으며 문득 심이에게 행복이 무엇인 것 같냐고 물었더니 '무언가에 빠져들어 집중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행복에 관한 아이의 정의가 내가 40년 가까이 헤매며 찾은 답과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여섯 살의 아이는 '인생은 살아 있는 마음'이라고 했고, 일곱 살의 아이는 아빠에게 쓴 편지에 '진짜 행복은 아빠 심장 속에 있다'라고 적었더랬다. 가끔 아이는 인생의 완벽한 정답을 알고 있는 것 같다.


2.

혼자 걸을 때는 걸음이 빨라진다. 나는 사실 빨리 걷기 대회에 출전을 해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늘 빠르게 걷는다. 걸음이 빠른 스스로에게 회의적이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 나는 느림의 미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탓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는 강박 또한 버리기로 했다.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하나라도 더 보고, 앉고 싶은 자리가 보이면 앉으면 그뿐이니까. 내게 허락된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스페인에서의 아침 산책도 무척이나 빠르게 진행됐다.


세비야의 고요한 아침 골목을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을 재빠르게 지나 메트로폴 파라솔 앞에 위치한 카페에 앉아서 카페 콘 레체와 크루아상을 시켰다. 오랜만에 진짜 이방인의 느낌으로 낯선 카페에 앉아 챙겨온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꽤나 몰입했던 탓에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는 한적했던 카페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순간 마음을 흔든 눈앞에 들어온 세비야의 풍경과 커피 원두의 향기와 낯선 이들의 미소. 그 공감각적 찰나에 문득 생의 목표를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넘치는 불안과 불안정성을 잘 견디는 것을 인생의 진짜 목표로 삼고 버티자. 외부 요인들은 제멋대로지만 내 마음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으니, 그 강력한 결정권을 마음껏 이용하고 사랑하자.


새로운 생의 목표 앞에서 나는 어느 때보다 야망에 찼고, 커피는 향긋했고, 스페인 직원의 미소는 친절했으며, 그 몰입의 아침은 내게 많은 것을 남기고 또 거품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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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건축가와 도심을 함께 걷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신청했는데 세비야라는 도시를 한층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제일 만족스러웠던 장소는 예전 유대인이 살던 '산타크루즈' 지구였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과 곳곳에 숨겨진 정원들이 아름다워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혼자 걸었다면 몰랐을 숨겨진 이야기도 많았다.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배경이 된 발코니도 보고, 마주 보는 집 창문을 열고 키스도 할 수 있다는 '키스의 골목(Calle de los Besos)'도 걷고, 유대인의 탈출에 도움이 된 삶의 길과 '수소나'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자신의 밀고로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비극의 주인공 '수소나'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누구도 자신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의미로 자신의 목을 거리에 걸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그녀의 해골이 백 년 넘게 이곳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해골 모양의 타일만 봐도 마치 해골을 본 양 으스스했다. 코르도바, 그라나다를 여행하며 만난 이슬람 문화와 더불어 유대인과 스페인의 교집합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난 1391년에는 세비야에서 4천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고 하니 유대인을 빼놓고 스페인 역사를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산타크루즈는 시간만 허락한다면 하루 종일 길을 잃으며 산책 해도 좋을 동네였다.

IMG_E7086.HEIC 매력적이던 산타크루즈 지구
IMG_9739~photo.JPG 열심히 투어 중인 우리

4.

한식한식 노래를 부르는 심이를 위해 세비야에서 또 한 번의 한식 타임을 가졌는데 세비야 한식집 <COCODAK(꼬꼬닭)>과 <단밤>이라는 가게였다. 꼬꼬닭은 양념 치킨이 맛있었고 단밤은 김밥이었다. 발랄한 스페인 처자가 싸주는 단밤의 김밥을 구스타브 에펠(파리 에펠탑의 건축가)이 설계한 수산 시장 '론하시장(mercado lonha del barranco)'에서 먹었다. 한국에서 먹는 김밥보다 맛있다며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통유리로 둘러 싸인 론하 시장에서 매력적인 가수의 라이브를 들으며 과달키비르 강을 바라봤다. 여행은 모름지기 바쁘게 투어하는 시간보다는 이런 시간을 닮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혼자 과달키비르 강 근처 트리아나 지구를 산책했다. 트리아나 지구는 고대부터 세비야의 주요한 항구로 이탈리아에서 유입된 도자기, 미술 작품 등의 생산과 유통으로 유명한 곳이다. 내가 이곳에서 제일 보고 싶었던 것은 콜럼버스보다 먼저 신대륙을 발견하고 소리친 '로드리고 데 트리아나'의 동상. 한참을 헤매니 다소 생뚱맞은 위치에 늠름히 서 있었다. 머나먼 땅을 가르키는 것이 분명한 그의 다급해 보이는 손동작이 신대륙 발견의 순간을 재현하고 있었다. 동상에서 5분 정도 걸으니 18세기에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교회인 산타 아나 성당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보니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어서 시끌벅적했다. 세비야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꽤 오래 바라봤다.

IMG_E6843.HEIC 단밤의 김밥
IMG_E6861.HEIC 론하시장 야외 테라스


스페인여행 (88).jpg 산타 아나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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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E7121.HEIC 이사벨 다리 위에서 바라본 세비야


5.

세비야의 마지막 밤에는 초현대적인 건축물인 '메트르폴 파라솔'로 갔다. 메트로폴 파라솔은 거대한 버섯 혹은 바삭한 와플 모양을 닮은 모던한 건물로 2011년 완공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목조건축이라는 이곳에서 세비야의 아름다운 노을과 야경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메트로폴 파라솔과 세비야 대성당을 한 눈에 담고 있자면 오래된 것과 새 것의 조화로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떠나는 날 날씨가 가장 좋아지는 징크스는 세비야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스페인에서 마지막 날, 어제의 강풍을 잊은 듯 갑자기 여름 날씨가 되었다. 그렇게 세비야는 우리에게 따뜻한 햇살을 마지막으로 선물했다. 12년 만에 다시 들른 세비야는 여전히 매력이 넘쳤고 '한 달 살기' 하고 싶은 도시였다. 이제 스페인을 떠나 포르투갈로 가야할 시간이다. 여행 중반을 넘어가니 떨어진 체력 탓에 리스본을 경유해 포르투로 넘어갈 일정에조금 암담해졌다.


나는 이 (개고생스러운) 여행에서 '우리는 왜 여행을 하는가'에 대해 내내 생각했다. 내 깨달음과 가장 유사한 문장은 유시민 작가의 글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데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나는 도시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 나 자신과 인간과 우리의 삶에 대해 여러 감정을 맛본다. 그게 좋아서 여행을 한다.


유시민, 유럽 도시 기행


내게 여행은 무언가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느끼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익숙한 이들과 낯선 도시를 여행하며 수많은 사건과 사고, 실패 속에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다. 낯선 도시의 이야기 뿐 아니라 너무 익숙했던 가족들의 다른 모습, 나도 몰랐던 스스로의 다양한 감정과 존재에 대해서 매일 느끼고 배운다. '그게 좋아서 여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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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0203~photo.JPG 메트로폴 파라솔 위에서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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