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이고 환상적인 세비야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by 심루이


1.

12년 전 세비야에 처음 왔을 때 마주친 광경을 오래 잊지 못했다. 붉은 조명이 켜진 환상적인 세비야 대성당과 그 앞에 누군가를 태우고 지나가던 말... 이건 21세기 동화의 한 장면이다!라고 외치고 싶었더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세비야의 매력에 온전히 홀렸는데 당시 한인 민박집 사장님도 나와 같은 심정으로 아예 한국 생활을 청산하고 세비야에 눌러 앉았다고 했다. <나의 안달루시아>에서 발견한 작가의 문장, '설명하긴 어렵지만 세비야는 어딘가 심각한 바람둥이의 인상을 가지고 있다. 멀쩡하던 사람도 이곳에 오면 누군가를 유혹하라는 유혹에 시달린다. 이 도시가 <카르멘>과 <세비야의 이발사>의 배경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이 도시는 사람을 홀리는 매력이 있다.


나는 가끔씩 세비야가 내게 보여준 그 환상적인 밤 풍경을 떠올리며 나이를 먹었다. 그럴 때면 자연스럽게 이 질문이 따라붙었다. 지금 다시 간다면 어떨까? 환상적인 설렘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때처럼 설레도, 그렇지 않아도 섭섭할 것 같았다. 그때처럼 똑같이 설렌다면 나의 단순(무식)함에 조금 실망할 것 같았고, 그때처럼 설레지 않는다면 역시 늘어나는 나이는 감탄을 갉아먹는 것이지...하고 체념할 것 같았다. 최민석 작가가 그랬다. '인생이 비참한 건 시간이 우리에게서 설렘을 앗아가기 때문'이라고. '사십 대가 됐고, 슬프게도 나는 이 모든 도시에 시큰둥해졌다'라고. 아악. 이 문장은 최근 사십 대가 된 내가 읽은 문장 중 가장 슬퍼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최 작가에 따르면 '생의 시곗바늘이 설렘과 만족은 줄고, 권태와 불편이 느는 영역에 도달한' 것이다.)


나는 감탄, 감동의 역치가 너무 낮아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유형의 사람이지만 확실히 나이가 드니 예전처럼 쉽게 설레기가 힘들어진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내겐 조금 특별한 도시, 세비야 시내로 접어들었다. 내 잡생각을 순식간에 날아가게 해 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세비야 올드타운의 좁디좁은 골목이었다. 별생각 없이 구글에서 안내해 준 길을 따라 호텔로 접근했더니 과장 좀 보태서 말(=horse)도 지나가기 힘들만한 골목을 안내해 주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우회전, 좌회전 구불구불... 분명히 차를 위해 만들어 둔 길이긴 한데 절대 차로 가서는 안되는 그런 길이었다. 좌회전해야 하는 우리를 바라보는 벽에 붙은 유럽인들의 표정이 꼭 뭉크 <절규>에 나오는 그것과 흡사했다. 사람들이 왜 다들 입을 모아 렌터카 보험은 모든 것이 보장되는 풀케어(full-care)로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는지 알게 되었다. 호텔에 가까스로 무사히 도착한 이후 나는 몸 속에서 한껏 쪼그라든 장기를 펴기 위해 잠시 침대에 누워야 했다.

KakaoTalk_20230429_183139574.jpg 세비야 골목은 절대 절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해줬다.


2.

극한 곡예 운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우리가 세비야에서 묵을 숙소인 도나 마리아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정문에서 몇 발작만 걸어가면 세비야 대성당이 보이는 경이로운 위치를 자랑하는 호텔이다. 창문이 거의 없는 호텔방에 들어가니 이건 인간적으로 호텔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려운데... 싶은 것이 어젯밤 론다 파라도르에서 묵었던 것이 꿈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곳 테라스바에서 바라보는 대성당의 야경은 꽤 로맨틱하다.


주린 배를 붙잡고 근처 타파스바 <보데가 산타 크루즈>로 향했다.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가서 무려 '시금치'라는 단어를 아는 스페인 직원이 서빙하는 곳이라고 한다. 야외 테라스에 앉아 대성당을 바라보며 나는 맥주를, 아이는 콜라를 마시기로 했다. 한국말을 진짜 알아듣나 싶어서 '시금치'라고 이야기했더니 역시나 찰떡처럼 알아듣는 직원. '고맙습니다' 했더니 '괜찮아요'라는 정겨운 답변이 돌아와서 심이와 한참을 깔깔거렸다. 한국식 양념으로 구운 매운 돼지고기 타파스가 맛있어서 두 개를 추가해 싹싹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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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6422.HEIC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타파스


3.

세비야에 가면 꼭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바로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플라멩코 공연 관람이다. 플라멩코는 안달루시아를 대표하는 춤으로 아랍어로 펠라(Felah, 농민)와 멩구스(Mengus, 유랑인)가 합쳐져서 나온 단어라고 한다. 12년 전 플라멩코의 발상지인 이곳에서 공연을 관람했지만 춤을 좋아하는 심이를 위해 다시 보기로 했다. 무용가 두 명, 연주자 한 명, 가수 두 명으로 구성된 공연은 여전히 강렬했고 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귓가에 울리는 쩌렁쩌렁한 구두 굽 소리와 손뼉 소리. 슬픈데 기쁘고, 기쁜데 슬픈 뭐 그런 춤. 심이는 공연 초반 엄청난 구두 굽 소리에 놀랐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나름의 감탄으로 공연을 즐겼다. 소규모 공연이라 어디서나 잘 보이긴 하지만 미리 온라인으로 티켓팅하고 30분 일찍 가서 1열에서 관람하기를 추천한다.


공연장 옆에 '오렌지에 대한 모든 것'을 파는 집이 있어서 한참을 구경했다. 오렌지 바디로션, 오렌지 노트, 오렌지 디퓨저 등 오렌지로 만들어진 물건들은 끝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오렌지 와인과 오렌지 맥주를, 심이는 오렌지 볼펜과 노트를 구입했다. 오렌지 와인은 어제의 론다 와인처럼 꽤 달콤했다.


대성당의 야경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역시 12년 전의 전율을 안겨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조금 달라진 듯한 인상을 줬다. 대성당의 히랄다 탑과 말들과 알카사르는 건재했으니 아마 달라진 건 '권태와 불편'에 더 익숙해진 나일 것이다. 그동안 나는 꽤 오래 사회생활을 했고, 엄마가 됐고, 타국에서 살았다. 수많은 설렘의 마지막을 목도했고, 그것은 조금 슬펐지만 또 그렇지 않기도 했다. 세비야 대성당 앞에서 '또 성당이군...'이라는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지난하게 이어지는 생의 순환에 대해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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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6558.HEIC 나를 9등신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헌신적인 심이와 춘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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