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맛, 열무국수
1.
검색창에 노인 우울증을 쳤다. 초 애주가인 아빠가 어느 날 더 이상 술이 당기지 않는다고 했다. 하루 종일 빽빽한 스케줄을 소화하시곤 했는데 최근 모든 일에 의욕도 떨어지고 있다. 경미한 우울증의 신호가 아닐까 싶어 마음이 복잡해졌다.
감정의 원인은 한 가지일 수가 없다. 수면 장애에 꽤 오래 시달리고 있는 엄마, 불편해진 거동, 외부 활동 감소로 인한 소외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엄마는 요즘 오래 복용한 신경 정신과 약 때문에 컨디션이 들쑥날쑥하다. 부정적인 에너지일수록 전염성이 강하니 한 집에서 생활하는 아빠(특히 이 병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낮은)를 답답하게 한다. 가끔 아빠는 무기력한 엄마를 향한 걱정인지 짜증인지 모를 감정들을 한 바가지 쏟아낸다.
거동이 급격하게 불편해지신 것도 요인 중 하나다. 여전히 운동은 하시지만 예전에 즐기던 마라톤이나 등산은 이제 먼 이야기가 됐다. 호기심이 많아 두리번거리며 걷는 습관 탓에 원래도 자주 넘어지는 아빠였지만 최근 그 횟수가 증가했다. 아빠의 몸에는 크고 작은 멍들이 늘어갔다. 바닥에 앉으시면 두 손을 잡아 드려야 무사히 서실 수 있다.
심장, 뇌, 전립선, 고혈압 등을 체크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는 대학 병원 투어도 스트레스를 더한다. 생로병사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결코 쉽지 않다. 육체는 정신을 지배하니 아빠의 우울감은 특별할 것이 없다.
2.
아빠를 관찰하면서 최근 유행하는 MBTI와 노인 고독의 상관관계를 깨닫게 됐다. 노인이 된다는 것이 외향(Extraversion) 성향의 사람에게 더 잔인할 수도 있다는 것. 나이가 들수록 모임이나 배움의 기회가 적어진다. 하루도 집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고, 무언가를 배우고,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는 극 E 성향의 아빠와 외출보다는 집에서 쉬는 것을 선호하는 내향(Introversion) 성향의 엄마가 이런 자연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는데 차이를 보인다.
친한 친구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난다. 이번 달에도 친구 부인의 임종 소식을 두 번이나 들었다. 이 모든 변화가 다른 이와의 교류에서 에너지를 얻는 아빠를 더욱 외롭게 하나보다. 친구의 전화 한 통에 아빠의 목소리가 커지고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몇 번 목격했다.
3.
오늘은 면을 삶아서 열무김치 소면을 만들기로 했다. 면을 싫어하는 엄마는 면을 잘 삶지 않았다. 이것이 면을 좋아하는 아빠의 평생 불만거리였다. "엄마가 면 요리를 잘 안 해줘"라고 몇 번이나 투덜대셨지. 그냥 스스로 면을 삶아 드셨으면 깔끔하게 해결될 문제였는데 그러기까지 40년이 걸렸다. 면을 물에 삶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만 정성이 필요하다. 물이 끓어넘치지 않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한소끔 끓으면 찬물을 넣고, 또 한소끔 끓으면 찬물을 살짝 부어준다. 부들부들해진 면을 흐르는 물에 여러 번 씻고 손으로 비벼 밀가루 냄새를 뺀다. 여름이면 늘 냉장고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열무김치에 동치미나 물냉면 육수를 섞고 면을 넣어서 후루룩 먹는다.
4.
웰빙과 웰다잉 사이에 '웰에이징'이 있다. 건강하고 활기차게 나이 들기. 요즘 내 관심 화두다. 웰에이징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건강한 나만의 루틴을 가지는 것 아닐까. 화려한 패션업계에서 은퇴해 작은 즐거움을 찾으며 조촐하게 지내는 밀라논나님의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를 보면 작은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일상 루틴은 몸의 뼈대와 같아서 '뼈대가 튼튼하면 일상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를 하고, 몸무게를 잰다. 물 한 컵을 마시고, 뉴스를 들으며 20분 정도 스트레칭을 한다. 오후에는 적당한 긴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외출할 일이 없어도 밖으로 나간다. 매일 신문을 정독하고, 일주일에 책 한 권을 읽는다. 일주일 중 하루는 온전히 남을 위해 쓰고 한 달에 한 두번은 전시회나 음악회에 가려고 노력한다. 무엇보다 그녀는 혼자 잘 논다. 사실 웰에이징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혼자서 잘 놀기.
나는 아빠의 우울을 감당할 능력이 없으니 노인 우울증에 대해 깊게 파기보다는 조리 교실이라는 루틴을 아빠 일상에 추가하는 편한 방법을 택했다. 배움에 인생의 방점이 찍혀 있는 아빠니 이 조리 교실에서 처음 해보는 칼질이 활력이 되어 줄 거라 기대하면서. 한동안 멀리하던 성당도 다시 다니시기로 했다. 이 주말 루틴이 약간의 평안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5.
열무국수는 언제나 맛있다. 더운 여름에는 더더욱. 시원하게 먹다 보면 한여름의 더위와 마음의 체증마저 사라지는 것 같다. 시원한 육수까지 말끔하게 마셨다.
식사의 마무리는 아직 집을 사지 않은 우리 심남매를 걱정하는 아빠의 잔소리다. 사실 아빠의 말은 틀린 적이 없다. 들을 때는 꼰대 같은 충고라고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아빠 말이 옳았다고 생각될 때가 많았다. 괜스레 심통이 나서 당신 말이 다 맞더라고요,라고 실토한 적은 아직 없지만.
어차피 이런 깨달음은 타이밍이 항상 늦다. 그러니 아빠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들은 대가로 남은 후회도 모두 온전한 내 몫이다. 취미는 후회와 반성, 특기는 '다시 시작하기'인 딸내미니 이제 마흔이 넘은 자식 걱정은 내려두시라고 말해도 될까. 물론 걱정이 습관이 된 아빠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잠든 아빠의 머리맡에 밀라논나의 이 문장을 적어두고 싶다.
-기성세대는 인생을 숙제 풀 듯 살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축제처럼 살게 해 주자.
늘 숙제처럼도, 늘 축제처럼도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지만 마음만큼은 페스티벌스럽게 가져보면 어떤가. 어차피 인생이 숙제라고 해도 모두의 정답이 다른 서술형 문제일 테니.
따져보니 아빠는 집도 있고, 자식이 다 커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으니 웬만한 숙제는 마치신 것 같아요. 그러니 그냥 남은 생은 축제 비스므리하게 안될까요, 아부지.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