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녹여주는 얼큰한 콩나물 김칫국
1.
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의 무뚝뚝한 아버지 김상식 씨는 꼭 나의 아빠 같았다. 듣는 이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말투와 부정 단어 사용 빈도가 높은 점, 내용은 부탁인데 뉘앙스는 늘 요구인 데다, 주위에 일어나는 안 좋은 일들(주말에 막히는 고속도로 따위의)이 내 탓처럼 들리게 하는 마법 같은 말투다. 여느 아부지들처럼 미래에 대한 과도한 걱정도 트레이드 마크다. 우리 가족의 중심이 분명한데도 물 위의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의 아빠는 김상식 씨처럼 사고로 기억을 잃지 않았다는 것. 아내를 '어이'라고 거칠게 부르며 가족보다는 등산에만 열을 올리던 상식 씨는 갑작스런 사고로 스물두 살 청년이 되었다. 졸혼을 선언한 할머니 옆에는 이제 자신을 '숙이씨, 숙이씨'라고 부르며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청년의 마음을 가진 할아버지가 있다. 드라마를 보며 상상했다. 우리 아빠도 스물두 살로 돌아가면 저런 모습일까? 엄마를 저렇게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볼까?
이 드라마는 우선 제목부터 훅 들어온다.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라니. 가족 간의 관계를 이처럼 잘 설명해 주는 묘사도 없을 것 같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좋아하는 연예인보다 아는 게 없는 사이. 생활 반경은 가깝지만 비밀이 많은 사이. 대놓고 솔직하면 큰일 나는 사이.
친척 모임을 묘사한 이슬아 작가의 문장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가족들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만 나누며 밥을 먹었다. 정말로 꼭 하고 싶은 말을 누구 하나라도 시작한다면 이 가족은 파탄이 날 것이다.
2.
세상에서 친절하기 제일 어려운 사람 역시 가족이다. 생판 남에게는 한없이 친절하고 다정하면서 막상 내 가족에게는 쉽게 짜증 내기 일쑤다. 내 불만은 아빠의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아빠가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만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무뚝뚝한 말투와 부정적인 언어는 예민한 청소년인 내게 지속적으로 상처를 줬다. 아빠의 말투와 뉘앙스를 바꿔보려고도 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부터 상처받지 않기 위해 달팽이가 되었다. 고독한 아빠에게 더 다정해지자고 다짐하고 야심에 차 아빠를 만난다. 야심의 수명은 짧고도 짧아,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가 나올라치면 이내, 즉시 달팽이처럼 온몸을 껍데기 속으로 숨겼다.
아빠도 다정한 사람이 되려고 분명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이 박인 말투는 쉽게 고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아빠는 말투 때문에 평생 큰 손해를 보며 살았다. 그 생각만 하면 어쩐지 울고 싶어 진다.
3.
오늘의 조리는 콩나물 김칫국 밀키트다. 냉동된 밀키트를 600ml의 물과 함께 냄비에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니 수업이라 칭하기에도 민망하다. 하지만 한 번도 해보지 않으면 이조차도 쉽지 않다. 꽁꽁 언 냉동 상태의 국을 통째로 넣으시면 돼요. 아아악. 상자는 넣으시면 안 돼요. 거 봐요, 이것도 쉽지 않다고 했죠.
오렌지 벽돌 같은 덩어리를 상자에서 잘 빼내 물과 함께 팔팔 끓이기 시작한다. 꽁꽁 언 국을 녹이는데 10분 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성격 급한 아빠는 1분도 지나지 않아 젓가락으로 쿡쿡 찌른다. 녹을 때까지 자연스럽게 두셔도 돼요. 그래야 더 맛있어져요.
요리에도, 인생에도 기다림이 주는 미덕은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시계를 본다. 김칫국이 끓기 시작하면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두부를 입맛대로 썰어 넣는다. 무언가에 잔뜩 시달렸을 때, 감기끼가 있을 때, 고향이 그리울 때, 분노가 스멀스멀 기어 나올 때, 이 얼큰한 국물을 재빨리 몸속으로 흘려보낸다. 고향의 맛이 나를 얼큰하게 위로한다.
4.
5년 만에 귀국하니 아빠가 확 늙었다. 성격은 더 급해졌고(나이 들면 여유로워지는 줄 알았다), 날이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 덕에 무지한 영역이 늘어나 짜증도 늘었다. 모든 것을 알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빠의 질문 리스트는 끝이 없었기에 나의 짜증도 비례해서 폭발적으로 증가해야 맞았다. 허나 내가 효녀로 거듭날 수 있도록 전 우주가 돕는 느낌이었는데 그때 마침 '부캐'라는 것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빠의 딸'이라는 본캐를 버리고 '문제 해결 능력 만렙의 상담사'라는 부캐로 거듭나기로 결심했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궁금한 게 많은 부자 노인이 상담사를 찾아온다. 그는 앞 주머니에서 두루마리 휴지처럼 길고 긴 질문 리스트를 꺼낸다. 블루투스 이어폰은 어떻게 쓰는 건지, 휴대폰에는 왜 자꾸 이상한 보안 검사 팝업이 뜨는지, 노트북 키보드 숫자 판은 왜 인식이 되었다가 안되었다가 하는지, 유튜브 영상을 저장하는 방법은 없는 건지, 음악 MP3 파일은 어떻게 듣는 건지, 다운로드한 영화에는 왜 자막이 나오지 않는 건지 등 해결하고 싶은 문제들은 끝없이 이어진다. 오랜 연륜이 있는 상담사는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고객의 말에 섞인 짜증과 분노 사이의 무언가가 문제를 향한 것이지 결코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인식하는 프로다. 더 특별한 재능은 고객의 언어에서 부정적 뉘앙스를 재빠르게 제거하고(한숨도 함께 제거된다) 텍스트로 변환시키는 AI스러운 탁월한 능력이다.
그러니 사람을 아주 빠르게 지치게 하는 재주를 가진, 호기심이 왕성한 노인 고객일지라도 짜증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5.
나는 조리 교실이 시작되기 전 부캐 상담사로 빙의해 아빠에게 던질 몇 가지 질문을 준비한다.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같은 <GQ> 인터뷰에서나 나올 법한 (오그라드는) 질문이다. 물론 불현듯 맞닥뜨린 아빠의 눈물 같은 돌발변수로 인해 인터뷰 결과는 신통치 않을 때도 많다. 하지만 한 사람을 요리조리 뜯어보고, 돌려보고, 던져도 보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시간은 그 자체로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한 사람이 가족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석원 작가의 <순간을 믿어요>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늘 많은 말을 주고받는 사이라도 진짜 대화가 필요한 순간은 얼마든지 온다.
어쩌면 지금이 우리의 그 순간이다. 그러니 나의 신나는 부캐 놀이는 계속될 것이다.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