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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May 21. 2024

자랑이 되는 슬픔

함께 울고 함께 슬퍼하는 특권에 대해

1.

요즘 즐겨보는 예능 프로그램 <연애남매>에서 엉엉 울었던 장면이 있다. 


윤재, 지원 남매의 엄마는 십여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힘들게 자식들의 유학 뒷바라지를 하다 암을 얻었다. 그때의 심정을 제작진이 물었다. 


나는 당연히 '한 평생을 자식들 뒷바라지만 하다 병을 얻어서 너무 속상하고 슬프다, 내 인생은 어디에 있나'라는 류의 이야기를 하실 줄 알았다. 하지만 엄마의 대답은 달랐다.  


-그때 당시 슬펐던 게 내가 평생 애들한테 올인하고 이렇게 자부심 가지고 살았는데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구나. 


엄마는 본인이 가장 아픈 순간에도 자식의 힘듦과 상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실명'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을까, 자식들에게 민폐가 되었다는 걱정이 컸을까. 후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따가웠다. 


한동안 엄마는 큰 불행을 전한 저승사자처럼 행동했다. 우리의 즐거운 일상이 본인 때문에 망가졌다고, 다들 고생해서 어떡하냐고 사과했다. 맹세코 우리는 전혀 불행하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낯선 우주에서 만난 이들이 마음을 모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일까. 


오랜 시간 엄마의 우울을 도울 수 없다는 절망에 빠져있던 나는 휠체어를 밀 수 있어서 좋았다. 대신 아파줄 수는 없지만 편안한 휠체어 핸들링을 선보일 수 있고 안약 뚜껑을 열어 엄마에게 건넬 수 있다. 엄마가 좋아하는 밤빵을 사서 엄마 입에 넣는다. 구체적이고 성실하고 생기로운 사랑이다. 


'어떤 일도 실제로 경험하기 전까지는 결코 현실이 되지 않는다'고 존키츠가 말했던가. 병실에 앉아 창가를 바라보면 낯익은 얼굴들이 스쳐갔다. 응급실에서 아빠를 보내야 했던 친구, 뱃속의 아이를 지키려 6개월 넘게 침대에 누워 있던 친구, 얼마 전 부친의 장례식장에서 '네 차례는 늦게 오길 바라'라고 말해준 선배도. 담담하게 토로하던 그들이 생과 사의 기로에서 얼마나 독한 싸움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독하고 고독한 싸움. 


무심했던 그때의 나를 뒤늦게 반성하며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특권에 대해 생각한다. 


박준 시인의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문장은 이렇다. 


눈이 작은 일도/눈물이 많은 일도/자랑이 되지 않는다./하지만 작은 눈에서/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신형철 평론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앞으로 그와 나에게 오래 슬퍼할 만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 그곳에 우리가 꼭 함께 있었으면 한다. 그 일이 다른 한 사람을 피해가는 행운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 같이 겪지 않은 일에 같은 슬픔을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고, 서로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우리는 견딜 수 없을 것이므로.


새로운 내 사전의 '사랑'은 결여나 결핍, 슬픔과 제일 잘 어울리는 단어가 됐다. 기쁘고 넘칠 때는 각자 기뻐해도 족하다. 오래 슬퍼할 만한 일을 맞닥뜨렸을 때, 결핍의 감각이 삶을 위협할 때, 함께 아침과 밤을 맞이하기. 결핍이 불안이 아닌 기쁨이 되는 그런 사랑을 꿈꾼다. 


2.

엄마가 잠든 밤, 병원 근처로 찾아온 친구들을 잠시 보기 위해 도둑고양이처럼 슬그머니 병원을 빠져나왔다. 겪은 일들을 입으로 뱉으니 비로소 현실처럼 느껴지는 효과. 우리 중 가장 먼저 아빠와 작별한 A와 치매가 찾아온 엄마를 간병하고 있는 B와 슬기로운 병실생활을 하고 있는 내가 모여 수다를 떤다. 


힘들기보다는 할 수 있는 게 있어서 다행이라는 내게 친구는 말했다. 


"니가 내 딸이었어야 했는데." 


서로의 슬픔과 위로, 유머가 마구 포개져 우리의 20년 우정이 약간 다른 색을 띠는 것 같다.


그녀들과 헤어지고 새벽 골목을 걸으며 다짐한다. 앞으로 더 많이 사랑하고 슬퍼해서 더 많은 자랑거리를 만들어 가겠다고. 


햇살 맞으며 걷기, 쥐포 한 장에 맥주, 평일 오후의 공항, 매콤한 빨간 어묵, 뜨거운 아메리카노의 첫 입, 좋아하는 작가의 모든 책 읽기, 타이베이 야시장, 슈크림이 든 붕어빵 


좋아하는 것들 리스트에 이것을 넣기로 한다.


함께 울고 함께 슬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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