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지 않은 최고의 여행
인류는 오래전부터 인생이 여행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선가 오고, 여러 가지 일을 겪고, 결국은 떠난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지구라는 별에 도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여행은 먼저 도착한 이들의 어마어마한 환대에 의해서만 겨우 시작될 수 있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1.
코로나가 전 세계에 발발했을 때 나의 주거지는 베이징이었다. 잠시 한국으로 피신한 사이 중국이 입국 문을 철저하게 닫아버려 8개월 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서울 호텔을 전전하며 겨울을 지나 봄, 여름까지 맞이해 버린 믿을 수 없었던 시절. 2020년에 가장 잘한 일은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것이라 자조하며 어떤 극한 순간에도 약간의 유머는 잃지 말자고 다짐했던 시간. 그때는 정말 두 번 다시 해외여행이라는 것을 가지 못할 줄 알았더랬다.
8개월 만에 베이징 집으로 돌아간 나를 위로했던 건 칼 라거펠트 칭따오 에디션. 한국에서 마시는 칭따오는 왜 이 맛이 안 나지... 서운해하며 맥주가 물처럼 싼 도시에서 맥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패션계의 한 획을 그었던 칼 할아버지의 명언을 생각하며.
내 생애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철없고 무모한 믿음이 구원처럼 느껴지는 날이었다. 비슷한 의미에서 최고의 여행 또한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배움과 기록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뻔뻔 지수 또한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으니 다음 여행은 더 즐거울 것이다.
2.
독립심이 유난히 강한 심이가 열 살이 넘어가자 보살피는 역할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보다는 감성적인 데다 작은 일에도 상처받고 정의감을 불태우는 편이라 마음 케어가 중요해졌다. 아이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 그 사람은 왜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상처 주는 말을 쉽게 할까? 하고 늘 물었다. 사랑이 넘쳐서 자잘한 상처도 쌓였다. 마음을 늘 필요 이상으로 많이 주고, 보낸 만큼 돌아오지 않는 마음을 자꾸 되돌아봤다. 아이의 수많은 질문 앞에서 대화의 결론은 대체로 이랬다.
-세상엔 참으로 다양한 사람이 있고 모든 사람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아.
나는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세상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할 수도, 야금야금 받는 상처를 줄여주거나 나눠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저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과 삶이 있는지 알려주는 것뿐. 여행만큼 이 진리를 집약적으로 깨닫게 해주는 행위도 드물다. 아이와 하루 2만 보를 걸으며 우리가 만나는 것은 '다양한 삶',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까.
여행에서 우리는 조금씩 깨달아간다. 그래, 이토록 넓은 세상에 내가 아는 삶이 전부일 리 없지. 사람 수만큼 다양한 형태의 행복이 이곳에 있지. 때로 그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위로가 된다. 그 확인은 무엇도 틀리지 않고, 무엇도 정답은 아니라는 사실까지 함께 알려주니까. 편견이 있던 자리에 관용이, 막연한 상상이 있던 자리에 이해가 더 깊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우리는 계속 떠날 것이다.
3.
대만은 우리에게 최고의 맛과 다정, 안정감을 선사했다. 대만의 츤데레적인 환대에 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안 가본 도시가 세상에 이렇게 많은데도 여행의 끝에서 '조만간 또 와야지' 다짐하게 된다. 한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2박 3일로 대만 여행을 마친듯한 두 친구의 대화가 귀에 박혔다. 그들은 "2박 3일은 너무 짧아", "다시 타이베이로 가고 싶다"를 속사포처럼 반복했다. 마치 쇼미더머니 도전자처럼 랩 같은 타령에 나도 모르게 웃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고개를 돌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20일 있어도 짧던데요, 못 해본 게(=못 먹은 게) 아직 너무 많아요.
감동의 역치가 유난히 낮아 웬만한 건 다 좋은 사람이지만, 그래서 무언가를 추천할 때 과연 합당한 추천인지 의심의 끈을 놓을 수 없지만 대만은 그런 내게도 자신감을 선물하는 곳이다. 가깝고 맛있고 다정하고 따뜻하다. 무엇이 더 필요할까.
4.
가오슝에서 돌아온 후 성수 카페 한편에서 MBTI 'EEEE'라고 알려진 뮤지컬 배우 김호영님의 메시지를 발견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잘 될 거라는 걸 이미 그냥 박아놨어요. 그 과정에 역경과 고난이 생겨도 결국 해피엔딩을 향해서 가는 거죠.
역시 파워 긍정이시군, 감탄하다가 떠올린 진실. 이건 내 얘기다. 오래전 사주에서 '대기만성형'이라는 단어를 만난 이후로 나는 인생을 낙관하기로 했다. 어쨌든, 끝은 해피엔딩이야,라는 끝없는 주문. 무책임한 마음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작게 만드는 것이 제일 쉬운 인생에서 한 줄기 동아줄 같은 믿음이라고나 할까.
인생을 닮은 여행도 그렇다. 주문에 실패해도, 길을 잃어도, 쪄 죽을 듯 더워도, 폭우가 쏟아져도, 비행기가 연착돼도, 결국 여행은 끝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온다. 모든 좌절과 사건 사고는 좋은 이야깃거리가 된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는 꽤 행복한 여행자가 될 수 있다.
순간을 음미하며 마음이 가는 대로 걸어봅시다.
인생도, 여행도 어차피 해피엔딩일 테니.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