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묘미
내게 여행이란 건 '가장 먼 곳에서 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좋든 싫든 그것이 나다. 그게 '진정한 나'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 자신의 일부인 것은 확실하다. 그리하여 여행이 끝날 때마다 나는 같은 사람인 채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 그건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보너스 같은 것이다.
한수희,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
1.
여행의 묘미는 역시 계획했던 것을 하지 못하는 데 있지 않나 싶다. 어느 작가는 이야기했지. 여행 준비의 마지막은 계획을 20% 덜어내는 데 있다고. 그런데 굳이 덜어내지 않아도 된다. 여행을 하다 보면 각종 사건, 사고들로 자연스럽게 덜어지기 마련이니까. 여행의 마지막 준비물은 계획을 모두 실행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너그러운 마음일 것이다. 무엇보다 여행의 본질은 작은 실패들을 쌓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2.
타이베이 근교 단수이에서 자전거를 타고 끝내주는 일몰을 볼 계획이었다. 비 때문에 자전거도, 일몰도 실패했다.
단수이에서 아쉬웠던 마음을 달래며 가오슝 치진섬에서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치진섬 페리 선착장으로 가는 길에 빗방울이 또 후두둑 떨어졌다. 이런, 대만에서는 자전거와 인연이 없는 건가. 후두둑 내리던 비는 비행기가 제대로 뜰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할 정도의 폭우로 바뀌었다. 가오슝 일정은 대부분 취소.
역시 여행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예전 같았다면 우울해졌을 것이다. 짧은 여행의 마지막에 폭우라니... 하지만 이제는 날씨를 탓하기보다 날씨를 받아들이는 여행을 한다. 여행을 슬프게 만드는 건 비가 아니라 우울한 내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이 우울은 전염성이 심하다는 것도.
비 오는 가오슝을 즐기기로 했다. 거센 비를 뚫고 맛있는 샤오롱빠오를 먹으러 가는 길. 큰 우산과 작은 우산으로 세 명이 써야 했기에 춘과 심에게 큰 우산을 주고 나는 뒤를 따르기로 했다. 다정한 부녀는 낯선 타국의 젖은 골목을 걸었고 우산은 심이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워낙 많은 양의 비가 내리고 있었기에 춘의 어깨는 이내 축축해졌다. 얼마 뒤 아빠의 젖은 어깨를 알게 된 심이는 울상이 되어 우산 손잡이를 자꾸 아빠 쪽으로 밀었다. 괜찮아, 나도 괜찮아, 하며 실랑이하는 둘을 뒤에서 가만히 바라보는 순간, 영원히 잊지 못할 뭉클함이 심장 한가운데를 강타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이 순간은 폭우가 선물해 줬다.
어딘가에 시간을 내어 여행을 갔는데 비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행을 하면 된다.
우리는 여행을 하러 온 거니까.
- 김신지, <평일도 인생이니까>
3.
여행의 끝에서 사진을 정리해 보니 이번 대만 여행 또한 온갖 실패로 점철되어 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엉뚱한 호텔로 향했고 베이터우 호텔에서는 예약 착오로 밤 11시에나 체크인을 할 수 있었으며 현금이 부족한데 카드마저 말썽이라 (고대하고 고대하던) 삼미 초밥을 먹지 못했고 타이중 여행의 목표라고 해도 무방하던 푸딩왕, 홍루이젠 본점은 모조리 문을 닫았다.
계획 완수율은 65.2% 정도지만 여행의 버킷리스트는 역시 완수하지 못해야 제맛. 중요한 수다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헤어진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다음 여행을 기약한다.
사실 여행의 진짜 목적은 평소 각자의 일상에 치여 함께 하는 시간이 적은 이들을 출근이나 등교 따위의 의무가 없는 낯선 공간에 던져 24시간 함께 하는 데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니 치밀하게 짜둔 계획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여행 마지막에 폭우가 쏟아졌다고 슬퍼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내내 함께 했으니. 땀을 줄줄 흘리며 볼 것도 없는 곳에 데려간 심가이드를 타박하며 낄낄 웃고, 그래도 기념인데 사진 한 장 같이 찍자고 사정하고, 우산을 써도 별 의미가 없는 폭우 속을 함께 거닐고, 택시 안에서 흘러나온 취향 저격 노래를 앞다투어 검색하는 그 순간들이 진짜 여행이므로.
타이난 션농지에 골목 사진을 보며 그때의 우리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우리 사이에 흐르던 공기의 느낌을, 그 사이의 침묵과 미소를.
아주 먼 곳에서 나와 너를 새롭게 발견하고 아로새기는 일. 그 발견이 때로 여행의 전부처럼 느껴진다.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