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의 용기까지 끌어낸 밤
1.
대만에는 옛 공장, 정부 건물 등 방치되어 있던 건축물을 문화, 예술을 테마로 크리에이티브하게 되살리는 공간이 많다. 타이베이의 화산 1914, 송산 문화창조단지, 타이난 BCP 문창원구, 타이중 문화창의산업원구, 가오슝의 보얼예술특구 등이 모두 그러하다.
오래된 양조장을 리모델링해서 탄생한 타이베이 문화예술 복합단지 '화산1914'를 걷다가 마음에 쏙 드는 공간을 만났다. 바로 <vinyl desicion(바이닐 디시젼)>. 다양한 LP 바이닐을 구경하면서 한잔할 수 있는 레코드샵인데 이국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 반해버렸다. 내부를 구경하고 온 춘이 비장하게 말했다.
"나 가고 나면 여기 꼭 들러줘"
춘과 심이가 없는 타이베이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한 장소로 더할 나위 없었다. LP로 둘러싸인 동굴 같은 느낌에 취해 책도 읽고, 음악도 감상하며 혼자 여행의 정취를 마구 느끼고 있었다. 피자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갑자기 음악 소리가 줄어들더니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대만 친구가 마이크 앞에 섰다. 라이브 공연이라도 시작하는 건가 싶어 마음이 춤을 췄다. 분위기는 예상과는 달리 조용하게 흘러갔다. 그녀는 잔잔한 클래식 선율 위에서 무언가를 읽기 시작했다. 궁금증이 차올라 수능 영어 듣기 시험 정도의 집중력으로 귀를 쫑긋했다.
?!!
그것은 아무래도 시... 같았다.
처음에는 내 듣기 실력을 의심했다. 신나는 락 모먼트가 어울릴 법한 시내 한복판 LP바에서 갑자기 시라니 내 부족한 중국어 실력을 탓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녀가 낭독하고 있는 것은 분명 시였다. 그녀의 시가 마무리되자 바로 옆에 있던 수줍음 많아 보이는 친구가 조용히 일어나서 자신의 시를 읊었다.
알고 보니 그날은 바이닐 디시젼에서 매달 마지막 목요일 저녁마다 열리는 시 낭송의 날이었다. 한때 시를 매우 좋아했던 나로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한 우연이었다. 딱딱하고 클래식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맥주 한잔하다 시 한 구절이 떠오르면 편안하게 마이크 앞에 서서 각자 좋아하는 시, 어릴 때 직접 적은 시를 자유롭게 낭독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쓴 시를 읽을 때는 모두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시의 언어는 보다 심오하니 완벽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만식 자유로움과 낭만 속에서 얼떨떨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2.
그때 갑자기 안경 쓴 인상 좋은 친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돌아가며 시를 읽는 중인데 한 번 읽어볼 생각이 없냐는 것이다. 나는 한국인이라 대만 시를 잘 모른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녀는 오히려 반가워하며 한국시를 한국어로 읽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머뭇머뭇 고개를 저었더니 환히 웃으며 한 문장을 남기고 멀어졌다.
"충분히 생각해 봐, 근데 정말 멋진 추억이 될 거야"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고 생각하고 맥주를 한 잔 들이켜는데 갑자기 김민철 작가의 문장이 머리를 때린다.
우연의 축제가 벌어진다면, 여행자의 목적지는 그곳이어야 한다. 오늘 계획한 것들을 모두 뒤로하고 우연의 축제에 뛰어들어야 한다. 평생을 이야기할 에피소드가 그곳에서 탄생할 것이다. 하물며 자잘한 불행을 매 순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여행자는 그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우연의 축제에 발을 들여야 한다.
김민철, <무정형의 삶>
한 번 용기를 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거의 읽지 않지만 한때 시를 흠모해서 문학을 전공한 내가(내 첫 이메일 아이디는 impoem이었다) 혼자 하는 20년 만의 여행에서 생긴 일이었다. 내가 대만에서 혼자 여행을 할 확률, 혼자 여행을 하다 마음에 드는 펍에 들어왔는데 시 낭독회를 할 확률, 외국인이 내게 시 낭독을 권할 확률, 대만 한가운데에서 한국어로 시를 읊을 확률...의 교집합을 생각해 보니 이건 평생 단 한 번도 없을 기적 같은 우연이다. 용기를 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대만 친구의 단단하면서도 다정한 눈빛이 마음의 빗장을 풀어헤쳤다. 그래, 오늘의 내 목적지는 시 낭송회 무대다. 또 볼 사람들도 아닌데 까짓것 해보는 거야. 화장실을 가는 척 바깥으로 나가 깜깜한 구석에 서서 뭐라고 얘기할지 중얼중얼 거렸다. 한국 시를 중국어로 해석도 해봤다. 번역된 시는 너무 유치해서 역시 한국어로 읽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황인찬 시인의 짧은 시 <무화과 숲>을 낭독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낯선 얼굴들 앞에서 핀 조명을 받으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중국어로 간단하게 내 소개를 하고, 대만 여행에 관한 소회를 밝힌 후 무화과 숲을 한국어로 낭독했다.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황인찬, 〈무화과 숲〉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남아 오래 품고 있던 시였다. 내 입에서 나와 공기 속으로 사라지는 한국어는 매우 생경한 아름다움 같았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언어였기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你们懂吗?(이해했어?)"라는 농담으로 짧은 낭독을 마무리하고 자리에 앉는데 전생의 용기까지 다 끌어다 써서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었다.
3.
이방인의 어설픈 시 낭독을 열정적으로 찍어준 대만 친구들이 에어드롭을 이용해 사진과 영상을 보냈다. 중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사용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라인 아이디를 교환하고, '다음 번 시 낭송회에서 또 만나자' 인사하고 길을 나섰다. 멀리서 누군가 불러서 뒤돌아봤더니 시를 낭독한 친구가 본인이 디자인한 엽서라며 선물을 건넸다.
그날은 혼자 여행의 마지막 밤이었다. 조금 먼 거리였지만 숙소까지 걷기로 했다. 오늘의 행운과 용기에 대해 충분히 곱씹어 보고 대견해 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차들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타이베이 역 근처 도로를 성큼성큼 걸으며 어떤 용기는 이름 모를 상처까지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대만 한가운데에서 한국어로 시를 낭독했다고 했더니 다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그런 신기한 우연이 있어? 어... 말하면서도 나도 믿기 어려워. 때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게 삶이라더니 진짜더라.
요즘도 매달 마지막 목요일 저녁 8시에는 디시젼 바이닐을 떠올린다. 4시간 남짓 머물렀던 그곳을 아련한 마음으로 그리워한다. 행여나 닳을까 그때의 떨림을 조금씩 꺼내서 들여다본다.
우연의 축제 속에 내가 있었다.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